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안나 May 10. 2020

셰익스피어의『리어왕』, 코딜리어의  ‘Nothing'


   

King Lear - "Cordelia in the Court of King Lear" (1873) by Sir John Gilbert.


   셰익스피어는 작품들 속에서 인간의 근원적 본능을 탐구했으며 신분, 성별, 민족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해내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역할에 남녀의 성을 구분 짓지 않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투영시켰다. 따라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은 당시의 사회적 고정관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강력하고 활기가 넘친다.


  『리어왕』은 부녀간의 갈등과 저항을 다루고 있지만 그들은 한나라의 왕과 공주들이기에 그들이 만들어내는 파국은 주변 인물들의 삶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과 세 딸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부권과 왕권에 묻힌 남성사회가 지닌 정신적 공허와 허구를 지적하고 있다. 또한  봉건주의와 가부장적 사회가 지닌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가 공존하며 상호 보완해야 함을 주장하는 선구자적 측면을 보인다.


   과거 여성은 육체적, 정신적, 윤리적인 면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이유로 정치세계로부터 제외되어 왔으며 작품에서 주로 가정에 국한된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리어왕』에서 첫째 딸 고너릴(Goneril)과 둘째 딸 리건(Regan)은 남성의 전유물로 치부되었던 냉혹한 정치세계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욕을 보여주며 통치와 권력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에 반박한다.  


  『리어왕』에서 막내딸 코딜리어는 리어의 인식을 깨우는 동시에 그의 인식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리어에게 코딜리어는 단순한 막내딸이 아니라 이상적인 심성을 지닌 여인이며, 자신의 말년을 막내딸에게 의지하고자 함에서 드러나듯이 그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리어가 자신의 영토와 권력을 자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바에 따라 차등 이양하고자 한 계획은, 예상하지 못했던 코딜리어의 한마디 ‘Nothing’으로 어긋나게 되며 『리어왕』의 파국은 시작된다.    


   고너릴과 리건은 온갖 화려한 언어로 리어의 마음을 사로잡아 광활한 영토를 물려받고자 한다. 리어가 소유한 영토의 위력은 코딜리어가 리어에 의해 상속권을 박탈당하자, 청혼자인 버건디(Burgundy) 공이 청혼을 포기하는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권 이양을 위한 자리에 왕실의 모든 권력자들을 참석시킨 것은 이후의 분쟁을 막고, 왕과 계승자 간의 권위와 복종을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절차이지만 언어로 표현된 딸들의 효심을 비교하여 영토를 분할하고, 자신은 국왕의 칭호를 유지하겠다는 것은 모순되어 보인다. 왕국 분할에 대해 리어가 “긴밀한 계획”(our darker purpose)이라고 언급한 것은 모순된 자신의 전략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고너릴과 리건은 광대한 영토를 상속받고 권력을 차지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현란하게 말로 드러내고 이러한 두 딸의 언행에 만족한 리어는, 두 딸에게 공평한 크기의 영토를 상속한다.


   “What can you say to draw A third more opulent than your sisters?” 라는 리어의 질문은, 언니들보다 많은 영토와 권력을 애정하는 코딜리어에게 이양하여 자신의 노후를 맡기고자 하는 계획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모순되어 보였던 유산 분배 방식은 언니들을 밀치고 막내딸에게 자신의 가장 큰 권위를 상속하고 싶었던 “긴밀한 계획”이었으며, 리어 자신이 코딜리어의 사랑에 어떠한 의심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식의 사랑을 말로써 판단하여, 존엄한 왕의 권위와 영토를 이양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권력남용과 언니들의 간사함에 거부감을 느낀 코딜리어는 ‘Nothing’이라는 말로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단호히 전달한다. 고너릴과 리건의 간사한 언어로 기분이 좋아졌던 리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코딜리어의 대답에 당혹해하며 다시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또 한 번의 ‘Nothing’이었다.


  『리어왕』에서 ‘Nothing’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첫째, 코딜리어는 치장된 말이 곧 마음의 표시라고 믿는 리어에게 언니들의 간사한 아첨들 속 진실된 사랑은 전혀 없음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둘째, 왕위 계승과 같은 국가의 공식적인 절차를 사적인 부모 자식 간의 감정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리어가 결국은 국왕으로서의 모든 권력을 상실하고 거지와 같은 ‘무’의 존재가 될 것임을 예언한다고 볼 수 있다.


   코딜리어를 왕국에서 몰아내고 왕관을 조각내서 두 딸에게 모두 나눠준 리어는, 수행원들과 처음 찾아간 고너릴의 궁에서 처참한 모욕을 당하게 된다.  이에 광대 또한 “이제 그대는 존재 없는 무가 됐다..... 나는 광대지만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다(now thou art an O without a figure..... I am a Fool, thou art nothing)”라고 말하며 리어를 그토록 분노시켰던 코딜리어의 ‘Nothing’을 상기시킨다.


   상속 이전, 자신들의 효심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던 고너릴과 리건은, 수행원의 수를 줄이지 말아 달라는 거듭되는 리어의 부탁을 백 명에서 오십 명, 다시 스물다섯 명, 열명, 다섯 명으로 줄이더니 결국은 “한 사람이 무슨 소용 있나요?(What need one?)라는 말로 일축해버린다. 형식상 왕의 호칭만을 유지하고 있던 리어에게 수행원들은 왕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는 최후의 표상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수행원들의 감축은 리어를 지켜주던 가부장제도의 남성적 상징이 거세되고, 두 딸에게 권력이 온전히 이양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코딜리어가 내뱉은 ‘Nothing’은 아버지에게 닥칠 비극을 뛰어넘어 자신에게 닥칠 비극적 결말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컸지만, 당대 여성에게 요구되던 순종적인 태도를 거부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코딜리어는 결국 공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고, 이후 아버지를 구하고자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허무한 죽음  ‘무’로 돌아간 것이다.         


   고너릴과 리건 두 딸에 의해 모든 것을 잃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황량한 들판에서 “죄를 짓기보다는 죄 지음을 당했다”(sinned against than sinning)라며 절규하는 늙은 리어의 모습은 독자와 관객들로 하여금 딸들의 행위에 타당한 동기를 부여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 코딜리어를 잔인하게 내치는 등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리어의 변덕스러운 성격 앞에서 고너릴과 리건은 자신들이 쟁취한 권력을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이러한 결말로 이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역사적으로 이어진 남성중심 사회에 의하여 규정된 규범들이 여성보다 남성에게 많은 특권들을 부여하였으며, 남성과 여성이 각자 자신의 성을 경험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두 성이 지닌 정치적, 사회적 차이성은 다르지 않음을 고너릴과 리건 두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상적인 여인 코딜리어의 헌신에 의해 모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참회하며 죽어가는 리어의 모습을 통해, 여성성이 지닌 의미를 부각시킨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인종차별적인 작품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