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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안나 May 12. 2020

1960년대의 참여시와 순수시

김수영과 김춘수를 통한 비교




   2014년 4월 16일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며 300여 명이 사망하고 실종된 세월호 참사는 인재(人災)로 인한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다. 당시 이에 분개한 국민들은 정부의 총체적 부실 대응에 대한 책임론을 부상시키며, 2016년 10월부터 20차례에 걸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통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전원일치로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낸다. 당시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1천700만 명의 시민들은 비폭력 평화시위를 통해 민주주의의 바른 실현을 외쳤고, 세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폭력을 통한 정권교체라는 역사를 만들어내었다. 1960년대 말 미국의 반전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촛불집회는, 2000년 이후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시민의 정치적 힘을 행사하는 대규모 시위 방식으로 발전하며, 국민에 의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내었고, 이러한 국민들의 힘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시초로 상징되는 4.19 혁명을 돌아보게 한다.


   1960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로 인해 투표권을 우롱당한 시민과 학생들의 독자적인 시위가 발발하게 된다. 정부는 경찰과 반공청년들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폭력과 살육을 자행하였으며, 이에 공분한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전국적 시위로 이어갔고, 결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의 틈을 타 박정희는 ‘사회적인 무질서와 혼란을 바로 잡겠다’는 구실로 5.16 군사정변으로 일으키고 국가 정권을 잡으며, 민주주의를 소망하며 흘렸던 무수한 시민들의 피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후, 박정희는 18년간의 유신독재를 이어가며 경제 재건과 사회 안전이라는 미명 하에 끝없는 억압과 검열을 이어갔다. 그러나 4.19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체험하며 이미 자유의 물결을 접한 당시 문단은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는 인식으로 시대, 사회, 정치에 대한 심화된 발언들을 쏟아내었으며, ‘인간성 회복’이 시인이 지닌 임무라는 의식 속에서 ‘시’는 적극적 대응의 방식으로 점점 발전되어갔다. 경제 재건을 위한 급속한 공업화와 근대화 속에서 사장되기 쉬었던 소외된 인간 문제들을 진단하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또한 요구되었다.


   이러한 참여시에 대한 시대적 요구 가운데 문학의 현실 참여에 대한 논쟁이 벌여졌다. ‘문학이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순수한 문학성을 지녀야 하는가’를 두고 일어난 이 논쟁은 당시 문학평론가 김우종의 “문학이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에서 시작되었으며, 여러 문인들에 의해 치열하고 지난한 논쟁을 이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수영은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다”라며 문학을 한 가지로 정의하고 구분 지우려는 행태들에 대해 비판한 바가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일제 해방으로 인해, 일제 강점기부터 발달해 온 근대문학이 본격적으로 꽃필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되었으나, 6.25 전쟁의 경험과 유신정권의 탄압 속에서 문학이 순수 예술만을 고집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2020년 현재, 지금까지의 한국 역사상 상상할 수 없었던 남북정상회담과 6.13 북미 정상회담을 통한 종전(終戰)의 가능성과 지난(持難)하게 양분되어 왔던 이념의 통합이 기대되는 상황에서, 격동의 1960년대 문단이 지녔던 상흔들과 성장과정을 당시의 대표적 문인인 김수영과 김춘수를 통해 들여다보겠다.      

         



 김수영의 시작(詩作) 과정과 참여시인으로서의 사명감


시인 김수영

   1960년대는 4.19 혁명을 좌절시킨 독재정권에 대한 분개와 개혁의지가 분출되던 시기이다. 사회정의구현을 위한 민주화의 노력이 민족적 과제로 등장하였고,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하며, 공업화로 인한 도시의 인구 집중화와 농촌의 궁핍화 그리고 사장되어가는 인권의 갱생에 대한 자각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가운데 사회 상황과 현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문학의 현실 참여 의식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김수영은 1921년에 태어나 1968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날카로운 현실의식과 뿌리 박힌 저항정신으로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前衛的) 구실을 담당했던 시인이다. 그는 196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억압과 반복되는 좌절 속에서 ‘현실인식’과 ‘다시 서기’를 외치며,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시인이다. 소시민적 자의식에 머물러 일상적 삶을 일상적 언어로 다루며, “역사를 이끄는 민중적 입장에서 역사적 전망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김수영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그가 한국시의 모더니즘적 지평을 확장했다는 긍정적 평가”(복도훈 7)들이다. 김수영은 시작(詩作) 가운데 특정한 시어(詩語)를 선별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 언어로 시를 써 내려갔는데, 이것은 ‘시’와 ‘우리의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공존의 인식에 기초한 것이며, 개화기 이후 지속되어온 외래 사조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삶’과 ‘현실’에 맞는 ‘시’를 쓰고자 했던 그의 의식적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1950년대 김수영의 초기 시에는 반(反) 전통적 태도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그에게 “전통은 서양문화에 비해서 낙후된 전 근대적 문화의 흔적으로 인식”(오문석 73)되었고, 전통적 형식에서 벗어난 모더니즘적 시 쓰기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육체적, 사상적 고난의 연속을 경험한 이후 김수영은 사회 저항적 참여시인으로 변모하게 된다. 김수영은 1953년 출간된 잡지 『희망』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시인의 길에 대해 “옳은 것을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나의 시는 이때로부터 변하여졌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피력하고 있다. 6.25 전쟁 초기, 서울에서 북한의 남침에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는 문화공작대라는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갔고, 탈출 시도 후에는 남한의 경찰에 붙잡혔으며, 2년 후인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다. 역사의 질곡에서 얻은 이와 같은 커다란 상처 가운데 특히 처절했던 포로수용소의 경험은 그에게 '자유'에 대한 뼈저린 열망을 갖게 하였다. 또한 1960년 민주주의를 경험한 민중들이 그동안 가해졌던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사회정의를 이루어내고자 했던 4.19 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혁명에 대한 충실성을 견지하며 이러한 충실성을 ‘사랑’으로 작품들을 통해 표현”(복도훈 6)하고 있다. 이후 정치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극단적 민족주의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현실 비판적 참여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한 김수영은, 모든 억압과 부조리에 대항하고자 했던 개인적 영역의 ‘자유주의자’로서의 설움과 비애를 사회적 차원의 성찰로 진화시켰다. 김수영은 시를 통해, 부정한 독재 권력과 그러한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비겁함, 후진국 지식인이 지닌 허위의식 등을 고발하며 당대 시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하였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을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의 ‘시’ 「폭포」(1957)는 『평화에의 증언』(9인 시집)과 『달나라의 장난』(1959)에 수록되었던 글로 1960년대 참여시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받는 글이다. 『달나라의 장난』은 김수영의 첫 개인 시집이자 그의 초기 시를 마무리하는 시집으로 삶에 대한 의지와 그러한 의지를 방해하는 현실 사이와의 갈등, 대결을 중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폭포」에서 김수영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폭포’에 전이시켜 소리 높여 진실을 외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곧은 소리를 내며 낙하하는 폭포는 불의에 대응하는 정의의 발현이며, 절벽은 지식인의 도덕성과 역사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상황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곧은 절벽, 어둠 속에서 더욱 큰 소리를 내며 낙하하는 폭포처럼, 어떠한 한계상황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대응해야 한다는 김수영의 외침은, 날카로운 폭포 소리로 귀에 맴돈다.


   또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은 「」(1968)이다. 이 작품은 ‘자유주의자’를 지향하는 김수영의 의지가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가 죽기 얼마 전 집필된 작품이며, 지배세력에 눌려 살아가는 민중의 굴욕적인 삶을 표현하고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작품 속 ‘풀’과 ‘바람’은 대립관계를 보여주는데, ‘풀’은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을 상징하고, ‘바람’은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지배세력’으로 해석된다.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다”. 이처럼 사회적 어떠한 압제(壓制)에도 꿋꿋이 갱생(更生)하며 삶을 이어가겠다는 김수영의 의지는, ‘풀의 자유’를 통한 ‘표현의 자유’ 그리고 ‘정치적 자유’에 대한 소망 또한 담고 있는 것이다.


   1968년 교통사고를 당하기 2개월 전, 부산의 한 문학 세미나에서 김수영은 그의 시론과 시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시(詩)여, 침을 뱉어라」를 발표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그의 시작(詩作) 시론의 핵심인 ‘자유’를 언급하며, 참여문학의 대표주자로서 그간의 시작업이 그에게는 자유 실천의 의지였음을 밝히고 있다. 김수영은 시가 지닌 내용과 형식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무엇을 말할까’에 전념하다 보면 형식이 따르게 되고, 어떻게 쓰는지’를 제대로 추구하다 보면 내용이 따르게 된다는 견해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자신의 시작 체험에 근거한 발언으로 바른 시 창작이란 내용과 형식의 분리할 수 없는 통일성을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 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253)     


이처럼 시를 쓰다는 것은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시작(時作)은 ‘머리’와 ‘심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며 ‘무엇’을 밀고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동시에’의 의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김수영이 말하고자 한 바는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으나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일 것이다. 김수영은 시인으로서의 예술적 자질을 갖추지 않고 사회의식을 다루려는 참여시인들을 경계하였으며 바람직한 참여시란 ‘사상성’과 함께 ‘예술성’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 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250)라는 언급을 통해 속류 참여시에 대해서는 달갑지 않고 바람직한 참여시에 대해서는 분에 넘친다는 자신에 대한 평을 남기기도 했다.        


             

김춘수의 순수시에 대한 지향과 실험적 모색     


시인 김춘수

   참여시가 요구되던 1960년대의 시단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시작(時作)을 이어간 김춘수는 자신이 순수시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김수영이 내가 하고 싶은 소리를 때에 따라 솔직하게 적절하게 해 주었지만 나는 추구하는 그 세계로 접어들어간 김수영이만큼 못 할 것 같았다. 한쪽에서 잘하고 있는데 내가 굳이 그 세계에 같이 참여하는 것보다는 의식적으로라도 다른 세계를 탐구해가고 싶었다”(김춘수 20). 이처럼 김춘수는 1960년대 당시 한국의 시인에게 요구되던 시대적 사명을 비켜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시의 본질에 대한 탐구, 시어(詩語)를 통한 치열한 실험을 통해 한국 시단에 헌신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김춘수의 이러한 시적 행보의 기저(基底)에는 그의 고통스러운 개인의 기억이 있다. 김춘수는 일제의 침략과 광복 이후 동족상잔의 비극을 몰고 왔던 이념의 폭력성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이후 민주화를 염원하던 민중의 절규가 독재정치로 인해 다시금 수장되던 상황에서 그는 절망하고 만다. 그는 이처럼 분열된 정신적 고통을 「처용단장」을 통해 서술적 이미지를 통한 독백으로 표출한 바가 있다. 이렇듯 당시 이념의 역사를 통해 느꼈던 상실감과 분노 그리고 공포와 절망 등은 당시의 관습적인 시적 형태와 관념을 파괴하려는 언어적 실험으로 이어진다.


   우리 현대 시사에서 드물게 시 창작과 이론적 모색을 함께 병행했던 시인 김춘수는, 지성보다는 감성에 근거하여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사물을 이미지로 엮어내는 뛰어난 언어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물의 외형적 인식에서 오는 감각이 하나의 낭만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고, 삶의 깊이와 사물의 의미, 그리고 존재의 비밀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관심”(조동구 2)을 시로서 드러내고자 하였다. 첫 시집 『구름과 장미』(1948)를 시작으로 김춘수는 1952년경 ‘꽃’을 제재(題材)로 한 세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1960년대 ‘무의미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시작법(時作法)과는 다른 형태의 글이지만 「」은 김춘수의 문학 과정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관계’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을 제재(題材)로 이끌어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꽃’을 소재로 하는 일반적 작품들이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에 대한 피력(披瀝)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김춘수의 ‘꽃’은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발성법을 보여주고 있다. ‘꽃’에 대비되는 개념은 ‘하나의 몸짓’인데, 무의미한 존재가 ‘하나의 몸짓’을 보여주고 ‘이름’이라는 의미를 전달했을 때, 드디어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나 또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눈짓’을 지어주고 싶다는 이 시는, 인간은 존재의 근거가 되는 상호 주체적 관계에서 본질적 관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그의 인식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당시의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수없이 목도(目睹)되었던 인간성 소멸과 생명경시 풍조에 전하는 관념 섞인 그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김춘수 문학은 크게 “‘꽃’을 중심으로 펼쳐진 존재론적 경향의 초기시와 ‘무의미’로 대변되는 해체론적 경향의 중기시, 그리고 인간적인 관심을 표명하며 의미와 무의미의 세계를 통합하려 했던 후기시”(전병준 163)로 나눌 수 있다. 작품 초기 릴케의 영향을 받았던 김춘수는 관념을 담을 유추를 찾고자 하였고,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전반기에는 의식적으로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하여갔다. 비유적 이미지를 관념의 수단으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즉, 시적 순수 상태를 지향하였던 당시의 김춘수는 시들의 후반부에 관념이 이입되는 갈등을 겪자 , 의식과 무의식 그 근원적 상관관계에 깊이 천착(穿鑿)하여 갔다.   

   

말을 아주 관념적으로 비유적으로 쓰던 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즉물적 (卽物的)으로 서술적으로 써보겠다는 의도적 노력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이 또 하나 새로운 타성이 되어 낡은 타성을 압도할 수가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타성은 새로운 무의식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것을 나는 전의식(前意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60년대 후반쯤에서 전의식 前意識을 풀어놓아 보았다. 이런 행위는 무의미한 자유 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나면 시 한 편의 초고가 종이 위에 새겨진다. 그다음 내 의고(의식)가 그 초고에 개입한다. 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전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사는 완성된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일지도 모르나) 나의 자유 연상을 현실을 일단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비재(非在)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기수가 된다. (김춘수 113)     


김춘수는 1976년 발표한 ‘시론’ 「의미에서 무의미까지」에서 “나의 시작(詩作) 과정을 그냥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시작을 다소 비판적으로 따져 보겠다”(106)고 하였는데, 그 가운데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그의 시상(詩想)을 지배했던 ‘무의미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자유 연상을 날카롭게 개입시켜 대상의 형태를 부서뜨리고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시키는 단계, 즉 비재(非在)의 세계를 열망했던 김춘수는 1960년대 후반 「처용단장 제1부」를 발표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죽은 다음에도 물새는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처용설화’에서 소재를 취한 이 작품은 연작시로 13편 모두 『현대시학』에서 발표되었다. 김춘수는 1963년 6월 『현대문학』에 소설 『처용』을 발표한 이후 ‘처용’을 제재(題材)로 많은 작품들을 내놓았는데 역신에게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처용’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에 깊이 박혀 있었던 불안과 분열의 자기 반영적 트라우마를 표출”(김지연 43)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어떤 특정한 의미나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초봄의 남쪽 바다에 내리는 눈의 인상을 서술적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는 것으로, 그 안에 담긴 미묘한 정서를 내면화하고 있다. 60년대 후반 그가 천착(穿鑿)해온 ‘무의미론’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인상파풍(印象派風)의 사생과 세잔느 풍의 추상, 그리고 액션 페인팅 기법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를 이해함에 있어 일반적인 언어의 해석의 아닌 인상(印象)의 수용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김춘수의 ‘시’ 창작과정은 결국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서 새로운 방향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시에서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묘사, 이미지의 배경이 되는 관념을 배제하고자 했던 그는 결국 이미지만이 굽이치는 자신의 시를 되돌아보며 “관념의 기갈이라고 하는 강풍”(김춘수 114)을 맞게 된 것이었다. 자각과 의도, 관념을 배제한 체 이미지의 자리에 이미지를 놓으려고 했지만, 다른 것들로 얽히게 된 이미지들이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그에게 허무를 안겨준 것이다. 이렇듯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의 갈등을 온전히 떨치지 못한 김춘수는 언어의 의미 영역을 벗어나고자 했던 자신의 ‘무의미론’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결국 시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순수시’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김춘수가 뜻하는 ‘순수시’란 단순히 사색과 내용을 은유와 비유로서 전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예술장르로서의 언어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었으며, 이후 그는 「접붙이기」(1997)라는 시론을 통해 그간의 작업들이 통합되고 재생산되는 과정들을 보여주며 불필요한 경계와 관념이 제거되고 확장된 순수시를 보여주었다.               




   1960년대는 시인들의 실천성을 요구하던 시대였고, 김수영은 그러한 문학사적 요구에 부응하는 문제의식을 보여준 대표적인 참여시 작가이다. 반면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본질이 상실되어 가는 참여시들을 견제하며 한국 현대시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한 순수시 작가가 김춘수이다. 그는 치열한 시작(時作)을 통해 시의 본질과 역할, 그리고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문제점들을 제기하며 순수시에 대한 지향과 실험적 모색을 이어갔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김춘수는 1922년 통영에서 태어났다. 둘 다 유복한 유년기를 거쳐 일본 유학을 통해 일찍 근대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일제 말기의 잔혹한 탄압과 광복, 6.25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몸과 정신이 유린당하는 고통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추구하고 나아갔던 문학의 길은 참여시와 순수시로 나뉘었고 이들은 당시 한국문단의 거대한 두 시단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성장했다. 이 두 시인은 각각 ‘시란 무엇’이며 ‘시인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치열한 자기 성찰과 시작 과정을 거치며 자신들의 시 세계를 구축하였다. 1960년대 김수영은 규제하고 검열하려 하는 모든 존재로부터 ‘자유’를 추구하였고 김춘수는 ‘무의미시’로 대표되는 시작(時作)을 통해 언어의 상징성으로부터 이탈하여 무의미에 이르고자 하였다. 이처럼 두 시인은 ‘자유’에의 추구와 함께 한국문학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여시’와 ‘순수시’라는 경계는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가 없는 현재가 존재할 수 없듯이, 지금의 한국 문단이 가진 다양성 속에는 과거 개인과 사회의 요구 속에서 치열하게 문학에 매진하였던 작가들의 혼과 헌신이 녹아 있는 것이다. 1960년대를 관통하였던 권력의 어두움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민중을 위로하고, 위대한 문학적 성취를 이룬 김수영과 김춘수, 두 작가에게 깊은 존경을 표한다.





인용문헌          

김지연, 「김춘수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연구」, 『동북아 연구』 43집, 2015, 101-116.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전집』 2집, 1968, 253-54.

김춘수, 「시와 시학」, 『대담』, 가을호, 1994, 20.

       「의미에서 무의미까지」, 『한국현대대표시론』, 태학사, 2000, 105-117.

       「접붙이기」 ,『한국현대대표시론』, 태학사, 2000, 118-126.

복도훈, 「혁명을 상속하는 언어, 사랑을 만드는 기술」,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9집, 한국문학과 비평 학회, 2015, 5-28.

오문석, 「전통이 된 혁명, 혁명이 된 전통」, 『상허학보』 제30집, 2010, 53-84.

전병준, 「김춘수 시의 변화에서 사회가 지니는 의미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7집,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3, 161-186.

조동구, 「관념과 존재론적 탐색」

최두석, 「김춘수 시론의 논리와 그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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