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 문단의 거목인 유치환은 1908년에 태어나 1967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오천 년 역사 가운데 이 시기에 나고 세상을 떠난 이들만큼 격동의 세월을 보낸 이들도 없을 것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면서 굴욕적이고도 참담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치욕적인 역사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끝나는가 했으나, 당시 강대국들의 이념과 이해관계에 의해 대한민국은 북과 남으로 양분되었고,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하하며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이어진다. 이 엄청난 비극은 1953년 휴전협정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이후 끝없는 이념의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졌고,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통해 18년에 이르는 군사독재정권의 시작을 알리며, 대한민국 국민은 사고와 표현의 자유, 행동의 자유를 금지당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과 소용돌이 속에서 시인이자 교육가로, 문단의 큰 거목이자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의 삶을 살아낸 유치환은, 근대 한국 문단의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일 것이다. 이러한 유치환의 시작(詩作) 활동과 사회적 행보에 대하여, 일제강점기하에서의 친일적인 작품 활동(형 유치진은 대표적인 친일파 인물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초기의 우호적인 협조를 언급하며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또한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조시인인 이영도와 죽음 직전까지 서신을 주고받으며 20년 넘게 이어간 사랑에 대한 사회적 지탄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오점들을, 문인과 교육자로서 투철한 사명의식을 지녔으나 나약한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던 유치환의 당시의 특수한 상황들에 의한 어쩔 수 없었던 선택들로 이해하며, 유치환이 이러한 굴곡진 역사 가운데 살아남았기에 가능했던 광대한 작품 활동과 한국 문단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을 근거로, 그의 어긋났던 행보들이 가려지길 원하는 이들도 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논란들은 제외하고, 유치환의 시작활동이 지니는 문학적 가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나의 ‘시’란 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시’라는 허울을 허가 없이 빌려 뒤집어쓴 것에 불과하다.
유치환『제9시집』(1957)
청마靑馬 유치환의 문학 생애를 일관하는 특징 가운데 가장 이채로운 것은, 그가 일제 강점기와 분단 시대를 철저하게 겪었으면서도 당대의 담론적 주류와 크게 조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령 그의 문학 행위는 우리 문학의 담론적 축을 형성했던 ‘순수/참여’ 범주나, ‘리얼리즘/모더니즘’, ‘전통/실험’등의 주류적 맥락에서 비껴 난 독자적 자리에 놓여 있다. 그만큼 그는 ‘생명’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고유한 음역을 보여 준 시인이었으며 나아가 우리 시사의 주요 흐름이었던 ‘정한情恨’이나 ‘순수 서정’의 범위에서도 한껏 벗어나 있는 이채로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유성호(한양대 교수)「유치환론」,『근대의 안과 밖』(2008) 서문 가운데
유치환에 대한 논의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역사주의적 과점에서 해석하고 논의하는 연구로 청마의 생애와 인간적 특성 및 교우관계 등의 전기적 사실들을 토대로 한다. 둘째, 사상적 측면에서의 연구로 작품을 작가의 정신적 산물로 보고 유치환의 시에 나타난 사상을 위주로 다루는 연구이다. 셋째, 형식주의적 관점에서의 연구로 작품의 구조, 언어와 형식, 기호론적 연구 등 주로 문학작품의 미학적 구조와 방법 등에 대한 분석적 연구이다.
역사주의적 과점에서 해석하고 논의하는 연구에 해당하는 청마의 생애와 인간적 특성 및 교우관계는 다음 글에서 따로 다루겠다.
유치환이라는 시인을 논할 때 “생명파”(生命波)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정주, 오장환, 김동리와 함께 생명에 관한 관심을 시작(詩作)화하며 “인생파”(人生派)라고도 칭해졌던 이 유파는, 1930년대 당시 순수 기교주의적 경향과 그에 반하는 모더니즘 경향이 대립하며 양분화되었던 시단에, 새롭게 등장하였다. 1936년 간행된 시 동인지 《시인부락》과 유치환이 주재한 시동인지 《생리》(1937)에 나타난 생명의식에서 발화된 “생명파”는 인간의 삶과 생명에 대한 열정과 이에 대한 탐구를 강렬한 의조로 시화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반하는 허무와 애수 또 이를 극복하려는 이념과 의지들을 작품 속에서 그려내고 있다. 생명파 시인들은 삶 속에서 시적 주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그들에게는 천착해야 할 주제였으며, 그들은 인간의 내면과 존재의 이유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바탕에는 내향적이던 유치환이 일본에서의 중학교 시절, 요시다 겐지로의 『생명의 미소』를 비롯한 일본 시인들과 니체, 파스칼의 철학을 접하고, 관동대지진을 겪으며 한국으로 돌아오게 도는 과정에서 지니게 된, 생명존중 사상과 허무주의 그리고 아나키즘적 사고가 자리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1. 순정과 사랑의 시학
유치환 시편의 속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가 토박이말을 중심으로 하는 기층 언어보다는 한자어의 미학적 가능성을 최대한 실험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가령 유치환의 시어 가운데에는 한자 사전에도 없는 한자어 조어造語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며 토박이말로 바꾸었을 때 정서적 이해가 훨씬 용이했을 표현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무거운 주제를 드러낼 때 한자어의 빈도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시의 시편들 가운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들의 대부분은 이처럼 생경한 한자어의 남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작품들이다.
청마 시의 주요 이미지는 ‘깃발’, ‘바위’ 그리고 ‘바람’이다. 그의 시에서 ‘바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람’은 자신은 보이지 않으면서 사물을 움직이게 하고, 땅에 있는 것을 눕히거나, 공중으로 들어 올린다. 또한 ‘바람’은 물결(그의 시 「그리움」에서의 ‘파도’)과 같이 파동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부드러운 존재이다. 청마 시에서 바람이 흔드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며,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리움이다. 이러한 ‘바람’을 담은 시들은 청마가 지닌 ‘순정’이 생래적인 그의 욕망이었음을 알게 한다. ‘순정’이 사랑을 만나면 이는 현실의 어떠한 제약에도 굴하지 않는 ‘열애’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열애’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순정’은 끝없는 그리움과 애수를 토하게 된다. 사랑에 닿아 있는 마음, 사랑을 부르는 마음은 시인의 혈류 깊은 곳에 뜨겁게 흐르는 ‘순정’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의지와 현실 비판의 시학 (조남현, 김인환 외, 『근대의 안과 밖』, 민음사, 2008, 59면)
청마가 일관되게 탐구했던 것은 ‘존재’ 혹은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 청마에게 무엇보다 고귀한 것은 ‘생명’이었으며 그의 시의 테마는 ‘생명’의 탐색으로 모아졌다. 하지만 그는 인간에게 삶이 곧 죽음이며, 재앙이나 고통 역시 신의 섭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분신으로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유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한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허무밖에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그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곳에 그의 질문이 머물게 된다. 여기서 그의 시가 탐구한 ‘의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청마에게 생명이란 ‘의지’에 의해 발현되는데, 인간이 그의 생명을 확장하고 존재의 완전성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허무 혹은 영원한 무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마에게 세상은 무無이며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이미 정해진 운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허무와 맞서는 자신의 의지만이 애련의 삶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자신을 인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세상은 ‘의지를 의지하는 심각한 고행의 길’이지만, 이 길을 비껴가면 나락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청마는 더욱 비장한 목소리로 생명을 열애하기 시작한다.
너는 본래 기는 짐승
무엇이 싫어서
땅과 낮을 피하여
음습한 폐가와 지붕 밑에 숨어
파리한 환상과 怪夢(괴몽)에
몸을 야위고
날개를 길러
저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서
호올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 「박쥐」 전문
1930년 12월 20일, 『동아일보』.
▪ 유치환의 초기시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박쥐이다. 1930년-1940년대에 쓰인 시편을 모은 시집 『청마시초』와 북만주 생활 5년에서 얻은 시편, 그리고 조국 광복까지의 시편을 모은 『생명의 서』가 청마의 초기시로 분류된다. 『청마시초』의 시 세계는 일제 탄압에 맞서 대항하지 못한 시인의 회환과 내적 갈등을 극복해 가려는 의지가 중심을 이룬다.
이 시에서 주목할 어휘는 땅, 낮, 폐가라 할 수 있는데 땅은 지상적 존재의 삶의 기반이며, 낮이란 존재가 드러나는 광명정대한 빛의 세계이자 정당함 혹은 당당함과 같은 의미가 투영된 어휘이다. 폐가는 지상적 존재가 존재로서의 삶을 안위하는 장소로서의 집의 의미를 상실한 공간으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 혹은 억압받는 피 식민지인인 지적 화자의 내면 공간을 상징한다. 폐가와 다름없는 이러한 공간에서 꿈이란 그야말로 파리한 환몽과 괴 몽일 수밖에 없다.
시적 맥락에서 박쥐의 날개는 ‘파리한 환몽’이거나 ‘괴몽’일 수밖에 없는 변용된 꿈이 기른 것이다. 그러나 기괴하게 비틀렸을 지라도 산 생명이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 꿈이요, 이상이기에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 푸드덕거리는 박쥐의 날갯짓은 말 그대로 압박받는 피식민지의 ‘서러운 춤’이요,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생명성의 처절한 몸짓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旗빨」, 전문
1936년 1월, 『조선문단』, (기ㅅ발)로 발표됨.
▪ 유치환의 시 가운데 대표적인 시로 1936년 『조선문단』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당대의 참담하고 비극적인 시대적 상황과 상호 교섭하는 시적 주제의 내면의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시에서 깃대는 ‘지상’에 꽂혀 있지만, 旗빨은 백로처럼 날개를 펴므로 하늘/땅의 경계에 있다. 또 바다를 향해 ‘손수건’처럼 휘날리는 깃발에서 보듯 바다/육지의 경계에 있다. 즉 어느 모로 보나 ‘旗빨’은 지상에 꽂혀 있으나 ‘날개’를 펴는 것으로서 자유/억압, 현실/이상의 경계에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시각적 이미지의 깃발을 ‘아우성’이라는 청각적 이미지로 바꾼 듯이 보이지만 ‘아우성’은 소리 없는 이라는 모순적 수식에 의해 다시 시각적인 이미지로 되돌아가며 깃발의 모습을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旗빨’이야말로 “이중구조 또는 모순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운명에 묶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이며, 동시에 이성의 법칙에 따라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감성의 소용돌이에 뒤채이게 마련인 인생행로를 반영한 것”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그리움」, 전문
1949년 8월, 『신태양』.
▪ 시 속 화자는 파도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고 물으면서. 무슨 일일까. ‘임은 뭍같이 까딱 않’기에 하는 말이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 뭍을 향해도 뭍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지 않은가. 그것을 그대로 빗대어 피도에게 묻는 것이다. 그것도 ‘어쩌란 말이냐’를 세 번 반복하며 강조하여 묻는데 그만큼 절망감에서 나온 절규로 들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지막 행이다.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임은 뭍처럼 까딱 않으니 나는 어쩌란 말이냐고 묻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은 ‘날 어쩌란 말이냐’이다. ‘나는’이 아니라 ‘나를’이다. 시 속 화자 자신이 목적어가 된다. 즉 파도에게 ‘나를 어쩌란 말이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무엇일까. 그냥 시 속 화자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이겠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 혹은 ‘나의 상황’ 일 것이다.
임은 향해 파도처럼 아무리 부딪혀도, 아무리 달려들어도, 아무리 사랑을 고백해도 임은 파도에 까딱 않는 뭍처럼 꿈쩍도 않으니 ‘내 마음’을 어쩌란 말이냐, 찢어질 것 같은 내 마음을 어떻게 추스르느냐고 묻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임(뭍)은 일개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시 속 화자가 결코 다가서지 못할 어떤 절대적 존재이며 ‘나’의 상대적 왜소함은 강조된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 1장」, 전문
정확한 발표일을 찾기 어려우나 1939년 『청마시초』에 수록된 작품이다.
◼ 작품 속 화자는 ‘부대끼는 생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을 찾아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홀로 사막과 대결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반드시 회복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다. 화자의 의지가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그의 각오가 너무도 가열하기 때문이다. 그의 생명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서는 곳은 화자가 선택한 사막 공간이 지니는 양면성에서 온다. 그 사막은 낮과 밤이 교차하는 곳이고 모든 것이 사멸하고 생성될 수 있는 원초적인 변화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생명의 서」는 궁극적인 생명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지켜 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엄숙하고 비장한 남성적 어조로 이어가며 ‘사막’이라는 극한적인 공간에서 참된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박노균, 「니체와 한국문학(3)-유치환을 중심으로-」, 『개신어문연구』 제36집, 2010, 142면)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이 훤히 내려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촘촘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에게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에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전문
1953년 6월, 『문예』.
◼ 이시는 허무의 극복이라는 의지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념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일반적인 유치환의 시와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센티멘털리즘에 휩싸인 사춘기적 연정을 노래하는 듯한 이 시는 진정한 행복의 가치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지극히 순결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진실로 참되고 옮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에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못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중에서
1960년 3월 13일 『동아일보』
◼ 이 시는 3.15 부정선거 직전에 쓴 작품으로 자유당 말기의 부정부패한 정권을 비판하는 준엄한 정신의 소리를 들려주는 시이다. 이때 이미 청마는 1969년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는 글로 인해 경주고등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이 작품을 출간한다는 것은 겨레와 역사 앞에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의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작품 속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겠다는 유치환의 말은 역설적으로 더 큰 울림을 전한다.
사회가 평화로울 때 시인은 그의 시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조화로움만을 추구하는 순수문학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은 언제나 이념理念이나 이상理想과는 괴리감이 있게 마련이고 시인은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와 현실과의 괴리감을 특히 예민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의 상호 조화를 위한 노력에 그의 신명身命을 바치게 된다.
위대한 문학정신은 언제나 자기 시대의 커다란 인생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는 존재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에서 그 의미를 얻어내고 그 의미를 구현하는데 참여할 수가 있어야 하며 누구보다도 투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혜선, 「유치환 시의 현실비판과 풍자 의식」 『동북어문학』 제9집, 1995, 98 인용)
지금까지 청마 유치환의 주요 작품들을 발표년 순서로 살펴보았다. 청마 시의 근원은 ‘순정’과 ‘의지’의 결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순정’은 그로 하여금 허무한 세상에 비정한 ‘의지’를 품게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이 ‘허무’ 임을 깨닫고 그에 대항하는 ‘의지’를 키우기 위해 저기 원시적 고독의 공간을 추구하였다. 일체의 인간적 감정을 초월하고 비정한 의지를 품고자 하는 그의 시편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순수한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청마의 ‘순정’이 불의한 세상을 마주할 때 그것은 가열한 ‘의지’의 목소리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 세계 안에서, 압제와 부정이 만연한 시대를 겨눈 작품과 사랑이나 그리움을 읊은 시편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이처럼 그의 시편들은 아름다운 사랑 노래이자, 치열한 생명 추구의 노래이며, 현실에 대한 응전의 목소리를 담은 증언록이기도 하였다. 우리 시의 ‘정한’과 ‘순수서정’ 편향의 지반에서 그의 시편들이 단연 돌올하게 읽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남현, 김인환 외, 『근대의 안과 밖』, 민음사, 2008, 67-68면 )
참고문헌
1. 기본자료
유치환, 『낙엽·바위』, 태학당, 1993.
, 『생명의 서』, 미래사, 1991.
, 『청마 유치환 전집 Ⅱ』, 국학자료원, 2006.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정음사, 1984.
, 『한국현대시 문학대계 15』, 지식산업사, 1987.
2. 기타 자료
⦁단행본
박철석, 『새발굴 청마 유치환의 시와 산문』, 열음사, 1997.
이영도, 『사랑했으므로 幸福하였네라』, 중앙출판회사, 1989.
조남현, 『근대의 안과 밖』, 민음사, 2008.
허만하, 『부드러운 시론: 청마 유치환의 시와 삶에 관하여』, 열음사, 1992.
유치환, 「우연히 시인이 되었다」, 『작가수업』, 수도문화사, 1951.
3. 논문 기타
박노균, 「니체와 한국문학(3)-유치환을 중심으로-」, 『개신어문연구』 제36집, 2010, 134-152.
신경림, 「남성적 그리움과 호방한 울부짖음의 시인」, 『시인을 찾아서』, 중등우리교육, 1997, 82-89.
오세영, 「존재의 초극-유치환의 시 세계-」, 『한국현대문학연구』 제7집, 한국현대문학회, 1999, 203-224.
오세영, 「유치환에 있어서 허무와 의지」 『한국시학연구』 2집, 한국시학회, 1999, 224-251.
이재훈, 「한국 현대시의 허무의식 연구-유치환, 박인환, 이형기, 강은교를 중심으로」, 중앙대 박사학위논문, 2007.
윤은경, 「유치환 초기 시의 생명애의 지평과 윤리」 비평문학 제51호 한국비평문학회 2014, 129-159.
이지원, 「유치환 시에 나타난 상징의 양상과 의미 연구」, 충북대 박사학위논문, 2013.
이혜선, 「유치환 시의 현실비판과 풍자의식」 『동북어문학』 제9집, 1995, 91-116.
조정명, 「Yeats and Yu ChiWhan: Love Powms」, 『한국 예이츠 저널』 제48집, 한국예이츠학회, 2015, 243-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