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by 김리온

며칠 전, ‘부고’라는 제목의 초대장을 받았다.

초대의 내용은 이랬다.

“그리고, 여든세 살 나의 장례식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장례식인데, 초대장이라니.
죽음을 말하는데, 웃고 오란다.
엄숙함 대신 유쾌함을,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라는 말이 잠시 나를 멈춰 세웠다.


연극배우 박정자 선생님이 출연 중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죽음을 맞는 한 인물의 마지막 순간을 연출하기 위해,
실제 지인 150명을 초대해 ‘장례식’을 연 것이다.
그것은 무대의 커튼콜이자, 삶의 커튼콜이었다.

죽음이 연극처럼 무대 위에서 펼쳐지다니, 어쩐지 부럽고 멋져 보였다.

‘죽음을 이렇게 맞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문득 내 아버지 장례식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정말 너무 슬펐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르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러웠다.

항상 큰일이 있을 때 우리 곁에 계셨던 분인데, 그 자리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그 사실 하나로 세상이 비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박정자 선생님의 장례식에는

그분의 목소리가 있었고, 눈빛이 있었고, 무대 위에서처럼 마지막까지 함께 웃을 수 있었다.
가족들이 함께했고, 친구들이 함께했고, 그 자체가 하나의 오래 남을 추억 같아 보였다.

죽음을 맞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해서 이별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삶의 마지막 인사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삶은 유한하고, 죽음은 불가해하다.
하지만 그 불가해함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는 것,
즉 인식할 수 없는 경계를 상상력으로 조형해 보는 일—
그것이 예술가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라 했고,
장 아메리는 그것을 ‘실존의 무력함 앞에 선 존엄’이라 말했다.
박정자 선생님의 장례식은, 그 철학적 선언들을 살아 있는 언어로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이었다.

‘죽음을 타자화하지 않고 자신의 무대로 들여오는 일.’
그 행위는 결국 삶의 주권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늘 생각해 왔다.
죽은 뒤에는 장례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굳이 사람들을 모으지 않아도 된다고.
죽음은 내 것이고, 장례식은 내 의지로 생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죽음은 나의 것이지만, 장례는 남겨진 이들의 몫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박정자 선생님처럼,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미리 가져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장례를 준비할 일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장면까지 ‘존재’로서 완성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떤 태도로 삶을 마주할 것인지,
그 태도야말로 마지막을 결정짓는 핵심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죽음을 연극처럼 맞이한 박정자 선생님처럼,
삶도 무대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그 끝 역시 한 편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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