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전시를 본 지 십 년이 가까워져 오지만, 매번 새롭습니다.
어린 시절 아기띠에 안겨 조용히 그림을 보던 아이는 이제 주체적으로 작품을 마주 봅니다.
2022년 어느 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권진규 100주년 기념 전시를 함께 보러 갔습니다.
사실 저는 조금 망설였습니다. 권진규 작가는 조각으로 유명한 예술가입니다.
초월적 울림을 품은 작품들이 아이에게는 오히려 감흥 없이 스쳐 지나가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전시를 꼭 보고 싶었고, 아이는 언제나처럼 “응, 같이 가자”며 주저 없이 따라나섰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권진규의 흙냄새 같은 조각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작품의 재료가 주는 질감과, 인물들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표정들.
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관람을 시작했는데, 옆을 보니 서연이가 작품 앞에 바짝 다가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하나, 둘, 셋.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그냥 사진 몇 장 찍는가 보다 했는데, 한 작품을 찍고, 또 찍고, 다음 작품으로 가서도 빠짐없이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그 집중도에 제가 오히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찍어?”
아이는 렌즈 너머로 저를 힐끗 보더니 짧게 대답했습니다.
“멋있잖아.”
그 말에 순간, 저는 멈췄습니다.
아이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듯한 표정.
마치 "이 멋진 걸 왜 안 찍어?"라고 되묻는 듯한 눈빛.
저는 그 눈빛 속에서, 아이가 예술을 ‘느끼는 방식’을 본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이 참 좋았습니다.
전시를 잘 따라오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감동하고 있는 아이를 보는 일.
저는 그동안 그저 ‘조용히 관람하는 아이’로만 생각했지만, 아이는 자신만의 감상법을 차곡차곡 쌓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이제야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대부분 전시를 보기 전에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러 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보고, 스스로 느끼게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편이 아이가 더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서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보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아이가 관심을 덜 보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때면, ‘혹시 잘 몰라서 그런 걸까?’ 싶은 조바심이 듭니다.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설명을 덧붙입니다.
“다시 봐봐. 작가는 이런 사람이야. 작업에는 이유가 있어. 이런 점 때문에 높게 평가받는 작품이야...”
하지만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간결하게 말합니다.
"난 별로야. 마음에 안 들어."
맞습니다.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관심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롯이 감상하길 바란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조금 더 알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올라옵니다.
제 말이 옳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배운 내용이 정답도 아닌데.
또 한 번 아이에게 배웁니다.
예술은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만나는 일이라는 걸.
그날 전시장을 나서면서 아이가 찍은 사진들을 함께 보았습니다.
화면 속 조각들은, 제가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섬세하게 기록돼 있었습니다.
작품을 보는 시선, 구도, 순간의 선택. 그 모든 것이 아이의 언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아이가 더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하도록 맡기고, 아이만의 감상법을 즐겁게 지켜봅니다.
어쩌면 아이는 작품을 '보는 법'이 아니라, '느끼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배웁니다.
멋있잖아.
그 짧은 말 안에 얼마나 많은 감동이 숨어 있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