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호텔은 전부 좋았다
러시아는 항상 춥고 눈만 내리는 곳인 줄 알았다
나에게 러시아란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와 같은 곳이었다. 처음 이 영화를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 15세 이상 관람 가능한 영화인데 중간중간 몇 장면 때문에 엄마가 안방에 들어올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봤었다.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내가 굉장히 인상 깊게 본 영화였다. 어린 마음에 영화 맨 마지막 장면이 너무 안타까웠다. 지금 생각해도 그 장면이 먹먹하네......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안드레이 같은 사랑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러시아로 떠나기 전날까지 회사 업무는 모든 게 불안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사건 사고도 하나도 안 터졌고, 평소보다 1분씩이나 일찍 퇴근을 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내 여행의 징크스 중 하나는 휴가 전날에는 평화롭지 않아야 10일 이상의 휴가가 편안한데 말이다.
하지만 결국 사건은 공항에서 터졌다.
마추픽추에서 기념도장을 여권에다가 찍었기 때문에 나는 출국 수속을 거절당했다. 원칙만 내세우던 승무원의 냉정한 태도에 옆에 서 있던 엄마는 땀을 비 오듯이 흘리기 시작했다. 부치려고 했던 내 캐리어까지 빼라던 승무원 앞에서 나는 어떻게 변명을 할까 잠깐 고민을 했다.
여권에 이 도장을 찍은 게 잘못인 줄 몰랐네요. 마추픽추에서는 열차 안에서나 입구에서 전부 여권에 이 도장을 찍길래 저도 찍었거든요...
러시아는 다른 국가보다 입국 절차가 엄격해서 되돌아온 승객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희가 책임을 질 수 없기에 출국 수속을 해 드릴수가 없어요...
그런가요? 그런데 러시아보다 입국 절차가 훨씬 까다로운 미국에서도 이 여권으로 문제없었거든요? (나는 멕시코 시티에 갈 때 LA를 경유했던 도장을 승무원에게 보여줬다) 만약 되돌아오게 된다 해도 항공사에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이 여권으로 미국을 다녀오셨다니... 그럼 서약서 하나 작성해 주세요. 입국 거절 시 저희한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입니다.
나는 서약서에 싸인 하나를 하고 출국 수속을 하고 면세점으로 왔다. 왜 쓸데없이 여권에 도장을 찍었냐며 내 옆구리와 팔뚝을 사정없이 꼬집어 대던 엄마께 괜찮을 거라고 안심을 시켜 드렸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졌다. 입국 거절되면 한국에 와서 회사라도 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아찔했다.
어렸을 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해서 탈이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걱정하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더라. 그 전날 일 마무리해놓느라고 긴장했던 게 풀린 탓인지 나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러시아 입국이 까다롭기는커녕 직원은 내 여권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도장 찍고 보내주더라. 오히려 입국 심사할 때 엄마가 걸려서 내가 여행 온 거라고 도와드렸다.
우리가 물을 많이 쓰는 건지 거의 모든 호텔에 가면 세면대 물이 잘 안 내려간다. 엄마의 민원은 바로바로 처리해 드려야 한다. 호텔 직원 불러서 상황을 얘기를 했고,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시키기 위해 사진까지 찍어서 보여줬다.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해서는 역에서 가까운 크라운 호텔에서 묵었다.
휴가 땐 집에서 푹 쉬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텔 사진을 보니 돈만 있으면 호텔에서 쉬는 게 훨씬 좋긴 하구나 라는 걸 새삼 느낀다. 러시아에서 묵었던 호텔의 만족도가 꽤 크기 때문에 만약 다시 러시아에 가게 된다면 이 호텔을 다시 예약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