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다시 가게 된다면 미술관부터 둘러봐야지
외할아버지 집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나는 외갓집 곳곳에 있던 오래된 물건들과 빛바랜 그림이 좋았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촌 언니와 오빠는 그림과 물건들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한낮에 고요한 외갓집에서 무료함을 달래고자 나는 엄마 몰래 필름 카메라로 집안 곳곳을 사진을 찍었다. 어린 내 눈에는 모든 게 신기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외할아버지를 뵈러 마산에 가는 게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웠다. 마산역에서 할아버지를 만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를 택시에 태워서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집에 갈 때와 마산역으로 다시 돌아올 때 택시를 탔다. 그래서 나는 1년에 4번 택시를 타곤 했다.
할아버지 집에 도착을 하면 할아버지는 우리와 몇 마디 나누시고는 바로 응접실에 들어가셨다. 그 방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방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외출을 하시면 나는 할아버지 몰래 응접실에 들어가서 피아노를 쳤다. 응접실에는 오래된 책과 수많은 레코드판 그리고 할아버지 물건들에서 내뿜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밤이 되면 할아버지 집은 어두컴컴해졌다. 안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방이 어두워졌고 사방에 걸려 있던 그림 속 동물들과 사람이 살아 움직이면서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어른 베개가 높아서 잠을 못 자던 나를 위해 엄마는 방석을 포개서 베개 대신 주셨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른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가끔씩 할아버지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할아버지와 어울리지 않는 누추한 차림의 아저씨들이었다. 할머니는 대놓고 그 사람들을 반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손님이라고 다과상을 내놓으셨다. 그분들은 내가 알아듣기 어려운 대화를 나누곤 하셨다. 어린 내가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엿듣고 있으면 아저씨들은 더 신이 나서 큰소리로 얘기를 했다. 생각나는 얘기 중에 하나는 어느 대감 집 무덤을 도굴하기 위해 들어갔던 에피소드였다. 도굴 중에 이상한 기운을 느껴서 뒤를 보니 불빛이 번쩍거리면서 사람 눈과 마주쳤다고 한다. 아저씨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다가 정신 차리고 도망친 후 그 후로 하시던 일을 그만뒀다는 얘기였다.
할아버지는 본인 집도 직접 설계를 하셨다. 일본 책을 보시고 인부들을 불러 모아서 일본식 집을 직접 지으셨다. 꼬장꼬장한 성격 탓에 인부들의 의견은 잘 듣지 않고 본인의 뜻대로 집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구조가 특이했다. 이 특이한 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망원동에 있는 최규하 대통령 집에 갔을 때 할아버지 집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 집에서 나는 냄새도 외할아버지 집 냄새와 비슷했다. 후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할아버지 집 담벼락 앞에는 담장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의 큰 대추나무가 있었고 수돗가에는 할머니가 세탁기를 놔두고 굳이 손빨래를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아시고 물감 사는데 보태 쓰라고 용돈을 항상 두둑이 주셨다. 나는 용돈도 많이 주시고 오빠보다 나를 더 예뻐해 주셨던 외갓집 식구들이 좋았다. 평생 함께 할 것만 같았던 외할아버지께서 떠나신 후에야 나는 내가 할아버지와 외모와 취미가 매우 닮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비록 할아버지처럼 값비싼 그림을 아직까지는 수집하지 못하지만 그림을 보는 것은 좋아한다.
러시아에 가서도 거의 모든 일정은 미술관에 집중돼 있었다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미술관이 많아도 너무 많다. 러시아에 두 번 갈 각오를 하고 각각의 미술관에서 거의 반나절을 잡고 천천히 관람했다. 미술관 입장료는 그 당시 6천 원을 넘지 않았다. 러시아 미술에 대한 책을 사서 3번을 정독하고 가니 수 백개의 작품 중에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이 몇 개 있었다.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어느 미술관에 가도 사람에 치일 일이 없다. 여유롭게 보고 싶은 그림 앞에서 한참을 감상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던 그곳이 그립다.
러시아의 어느 미술관과 박물관에 가도 코트를 무료로 맡겨주는 게 인상 깊었다. 코트를 맡기고 번호표만 잘 가지고 다니면 몇 시간이 지나도 안전하게 내 코트를 찾을 수 있는 서비스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왠지 대접받는 것 같은 기분도 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