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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찾아 삼만리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녀원 안에서

by 문간방 박씨

비엔나, 파리, 교토, 시안, 아테네, 바르셀로나....

이런 국가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그 장면 중에서 묘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어느 국가에 가나 항상 묘지를 방문하고 싶어 하신다.

묘지의 경우 도심에서도 외곽에 위치해 있고, 외곽에서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곳이 많았다. 자유여행자로서 시간도 빠듯한 데 트램이나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다 보면 길에서 시간을 많이 버린다. 묘지처럼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을 굳이 방문하기 위해 시간과 체력을 버리기는 싫다. 하지만 여행 계획은 엄마가 다 짠다. 1일 차부터 10일 차면 10일 차까지 그 날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것 그리고 꼭 먹어야 할 음식과 사야 할 것까지 정해져 있다. 나는 돈 들고 따라다니면서 엄마가 물어보라는 거 현지인들한테 제깍제깍 물어보고 이정표 잘 보고 길만 잘 찾아 드리면 된다. 그런 엄마가 정해둔 일정 중에 묘지에 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면 나는 그때부터 살짝 막막해진다. 엄마가 보고 싶어 하시는 유명인들의 무덤은 생각처럼 쉽게 찾기 힘들다. 끝도 없이 광활한 구역 안에서 빨리 찾고 싶지만 크고 작은 비석 안에서 헤매면서 산모기들에 물어 뜯기다 보면 지옥이 바로 여기인가 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묘지 안에도 이정표가 A~Z까지 꼼꼼하게 표시가 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사람 묘라도 여행객은 한 번에 찾기가 힘들다. 마음이 급해지면 무덤과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는데 가끔은 파헤쳐진 무덤 안을 밟기도 하고, 관리가 안돼서 비석이 쓰러진 것 사이로 다니기도 한다. 날씨가 흐리거나 이슬비라도 내리면 그 안에서 뭐라도 나올 것만 같다. 그 와중에 광활한 묘지 안에서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어 지면 더 큰일이다.


그래도 막상 엄마가 원하던 대여섯 분의 묘를 잘 찾으면 엄청 뿌듯하다. 유명인들의 무덤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한 후 엄마는 항상 묘 앞에서 내 인증샷을 찍어 주신다. 그럼 난 환하게 웃으며 묘 앞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산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 하니까.


모스크바에는 유명한 묘지가 있다. 모스크바에 방문을 했다면 반드시 가봐야 할 곳 중의 하나가 노보데비치 수녀원이다. 노보데비치 수녀원 안에는 묘지가 있다. 16세기에 처음 조성된 노보데비치 묘지는 안톤 체홉,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니키타 후르시초프 그리고 보리스 옐친의 묘가 있다.


이 묘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구를 찾는 것부터가 첫 난관이었다. 붉은 담장 너머가 노보데비치 묘인데 입구를 찾느라 한 바퀴 도니까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찾아야 할 사람의 묘 위치와 이름을 출력한 종이를 내 손에 쥐어줬다.


각 국에 갈 때마다 묘지 안을 찾아대니 이젠 나름 요령이 생겨서 모스크바에서는 쉽게 찾았다.


20160925_093926.jpg CIS를 결성한 옐친의 묘다. 묘가 역시 남다르다. 묘 자체가 기념비에 국기라니!



20160925_094211.jpg 러시아에서 굉장히 유명한 발레리나의 묘였다. 사진을 보니 정말 예뻤다. 평생 꽃처럼 예뻤을 것 같은 사람도 나이를 먹고 죽는다는 게 슬펐다. 이래서 나는 묘지에 가는 게 싫다


20160925_094824.jpg 안톤 체홉의 묘다. 의사이자 극작가이지만 심각한 생활고를 겪었고 결핵으로 44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20160925_095302.jpg 쇼스타코비치의 묘다. 이름은 생소해도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관사에 살 때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엄마는 쇼스타코비치 묘 앞에서 한참을 더 머물렀다


묘지에서 1시간 정도 머물고 묘지 옆 수녀원을 둘러본 후 수녀님이 운영하시던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러시아 도자기 그젤을 그 날 가지고 온 돈 전부 털어서 사 왔다. 그젤은 서민적인 도자기인데 전부 핸드페인팅으로 만들어졌다. 수녀원 안에서 도자기를 살 줄 꿈에도 생각을 못했고 가격이 시내보다 훨씬 저렴했다. 두 손 가득 도자기를 사니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호텔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0160926_045034.jpg 티백 놓는 그릇인데 개 당 3천 원에 사 왔다. 전부 친구들 선물로 줬다


20160929_060751.jpg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위해서 산 러시아 전통 목각 인형과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은 인형이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에는 정말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호수를 바라보며 백조의 호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20160925_123924.jpg 엄마가 죽기 전 눈을 감을 때 이 풍경이 떠오를 것 같다고 하셨다. 엄마 인생에 다시는 못 올 것 같다고 하셨다. 그전에 나랑 한번 더 와야 할 텐데 말이다


20160925_123931.jpg 이 아름다운 호수를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걷고 있었다. 엄마랑도 다시 와보고 싶긴 하지만 나도 내 짝꿍하고 같이 와서 여유롭게 거닐고 싶다


20160925_124840.jpg 백조의 호수 영감이 떠올라야 하는데 호수 안에는 오리가 더 많았다. 엄마가 챙겨 오신 과일을 주섬주섬 챙겨 먹으며 호숫가 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즐겼다


20160925_124847.jpg 겨울에는 호숫가에 눈이 덮인 풍경이 예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갔을 당시 가을이었는데도 쌀쌀했다. 겨울엔 추워서 한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들다고 들었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을 찾아가기 위해서 지하철 역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갔던 게 기억이 난다. 근처에 학교가 있어서 학생들도 많이 봤는데 길을 헤매자 한국 학생이 반가운 한국말로 길을 가르쳐 줬던 것도 기억이 난다. 유명세에 비하면 자유여행객이 찾아오기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다시 가게 된다면 기억을 더듬어서 다시 한번 꼭 찾아가서 여유 있게 둘러보고 싶은 곳이다.


그 수녀원 안에 있던 그젤 그릇을 싹스리해와서 내 찬장 안에 넣어놓고 잘 사용하고 있다. 백마크가 오래된 거라서 소장가치가 있지만 여유 있는 주말마다 나는 그젤 그릇을 사용한다. 그젤을 사용할 때마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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