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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가을 대신 러시아의 가을

러시아의 대자연 속에서는 마스크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by 문간방 박씨

한여름 무더위 속에 갑자기 세찬 비가 내리더니 가을 날씨가 된 것 같다.

비 내리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회사에서 비가 내리면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하다. 내일과 내일모레 업무에 대해서 공장에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을 전달한 후에 나는 30분 일찍 퇴근했다.


사무실 출입구 바로 앞에 앙증맞은 CCTV를 상무님은 보안상 설치해 두셨다. 심심할 때마다 컴퓨터나 핸드폰에 연결해놓고 쳐다보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CCTV 설치하기 전에는 출근 시간이나 퇴근 시간 직전에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누가 있는지를 굳이 확인하고 다녔다. 그렇게 불안할 거면 본인이 직접 사무실 출근을 하시면 될 텐데 참 피곤하게 산다 싶었다.


다행히 사무실 내에 CCTV를 설치하는 건 법적으로 걸린다나? 그래서 상무님은 사무실 내에 CCTV를 설치하지 못했다


30분 일찍 퇴근하는 건데도 기분이 좋았다. 세차게 몰아치는 비에 신발과 가방이 다 젖었지만 순식간에 맑아진 공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집까지 가는 길이 멀긴 했지만 그래도 회사 근처에 집이 있는 것은 싫다. 회사와 집은 가능한 한 멀리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러시아의 초가을은 우리나라의 초겨울 날씨였다. 러시아 영화를 보면 러시아 여자들이 모자 샤프카를 쓰고 다닌다. 그래서 나도 러시아에서 사서 쓰고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샤프카 가격은 무지하게 비쌌다. 엄마와 내가 1일 동안 사용해야 할 금액을 훌쩍 넘고도 모자랐다. 샤프카 없이 쌀쌀한 날씨 속에서 소매치기들을 경계하며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러시아에서 3일째 되던 날에는 소매치기 관상까지 보게 될 정도였다.


20160925_153744.jpg 백조의 호수가 초연된 볼쇼이 극장이다. 관람비가 20만 원 이상으로 너무 비싸서 우리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5만 원에 백조의 호수를 봤다


백조의 호수를 볼 수 있는 극장은 여러 개가 있다. 그중에서 볼쇼이 극장 좌석이 가장 비쌌다. 건물 자체가 역사적인 이유도 한몫을 하겠지만 무엇보다 볼쇼이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백조의 호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얼굴과 몸매가 가장 예쁘다고 한다. 조막만 한 얼굴에 길쭉한 몸매로 백조를 연기하는 발레리나와 잔근육이 다 보일 정도로 연기를 하는 발레리노의 얼굴이 엄청 잘생겼다는 소문이 있다.


2명이서 40만 원 이상을 지불하고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겠지만, 엄마와 나는 50만 원 정도를 다른 곳에 사용하기로 하고 볼쇼이 극장 앞에서 인증샷만 찍었다.


20160925_161308.jpg 어렸을 적에 오빠 게임기로 많이 봤던 성 바실리 성당이다. 오빠가 게임기 잘 안 빌려줘서 마음 놓고 게임도 못했었다. 대신 난 직접 러시아에 와서 봤으니 내가 승자야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성 바실리 성당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알록달록한 양파 지붕이 실제로 가서 보면 내가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다.


20160925_162252.jpg 러시아는 정교회이다. 정교회의 특징은 미사를 드릴 때 서서 드린다. 종교가 없지만 이 그림 앞에서 남은 일정 소매치기 안 당하고 무사히 귀국하기를 기도했다


20160925_162310.jpg 성 바실리 성당 안 어느 천장에 천사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정말 천국이라는 게 있을까? 퇴근 시간 안 지켰다고 지옥 가진 않겠지


아침마다 호텔을 나서기 전 엄마는 그 날의 일정을 브리핑하신다. 잘 듣고 헤매지 않게 바로 모셔다 드려야 한다. 사실 길 잃고 헤맨 적이 더 많지만 태연한 척 엄마 손 꼭 잡고 거리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20160926_081220.jpg 호텔 밖 풍경이다. 저 멀리 볼가 강이 보인다
20160926_081227.jpg 호텔 밖 풍경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창 밖의 풍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백조의 호수 보러 마린스키 극장 가던 길에 만난 도스토예프스키다.


20160926_093601.jpg 다소 우울해 보이던 도스토예프스키 조각상이다. 왜 이렇게 우울해 보이나 싶어서 가까이 가서 봤더니 사방에 비둘기 똥 범벅이 돼 있었다


모스크바 외곽으로 나가기 위해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가며 1시간 정도 이동했다. 길을 헤맨 탓에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지만 다행히 마지막 입장 시간에는 걸리지 않았다. 외곽이라 그런지 바람이 더 차가워서 볼이 빨개진 채로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외곽으로 나오니 소매치기도 없고, 한적하고, 러시아 특유의 대자연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20160926_165029.jpg 성당 안에 미사 중이라서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다. 다들 서서 미사를 드리던데 다리가 안 아픈가?


20160926_165036.jpg 코 끝으로 느껴지던 차가운 바람도 좋았다. 와이파이도 안 잡히는 이 곳에서 회사랑 상무 다 잊고 돌아다니던 게 좋았다


20160926_165437.jpg 굳게 닫힌 문이 아쉬웠지만 체력이 다 떨어져서 계단 올라갈 힘도 없었다


20160926_171408.jpg 어렸을 때 궁전 그림 그리면 지붕을 이런 식으로 그렸었다. 파스텔톤 색감에 동글동글한 모양이 성당인데도 매우 귀엽다


20160926_173227.jpg 너무 춥고 배고파서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서 무작정 시킨 피자다. 영어 메뉴판이 없어서 그림을 보고 젤로 비싼 걸 시켰다. 그런데 위에 인삼인지 무슨 뿌리 식물이 얹혀서 나왔다.


제일 비싼 피자 가격은 고작 13,000원이었다. 엄마랑 사이좋게 4조각씩 나눠먹고 위에 있던 정체 모를 뿌리까지 반절로 나눠서 먹었다. 화덕으로 직접 굽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정말 맛있었다. 이런 거 보면 한국에서 파는 화덕 피자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싼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러시아에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그런데 내 방식대로 엄청 돌아다니다 보면 피폐해지고 지친 모습만 보일 텐데 이 모습을 보여줘도 될까?라는 고민도 살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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