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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y 29. 2020

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M에게

M도 나도 40살까지는 버틸 수 있기를

M은 16년 차 과장이다.

나보다 한 살 많지만 항상 나에게 존대를 해준다. 대부분의 회사 사람들은 나와 M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의외라고 얘기를 하곤 한다. 


나에게 있어 M은 특별한 존재다. 이 회사에서의 희로애락은 거의 M과 함께였다. 언제 어떻게 이렇게까지 친하게 됐는지 우리 둘 다 알지는 못한다. 낯을 많이 가리고 말수가 적어서 같이 밥 먹거나 카페를 갈 때도 보통 나 혼자 떠들어댄다. 그러다 보니 나의 부서 이야기는 물론이고 내 친구들 이야기 그리고 나의 사소한 연애사까지 M은 거의 다 알고 있다. M은 나보다 회사 생활 짬밥이 훨씬 많은데도 회사 찌라시 정보에는 빠릿빠릿하지 않다. 찌라시 정보는 거의 항상 근거가 있는 정보였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M에게 거의 매일 카톡을 보낸다. 


가끔씩 바람 쐬러 사무실 근처 공원에 갈 때 M은 나와 나란히 걷는 걸 좋아한다. 누가 불러내 주지 않으면 근무 시간에 혼자서 밖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아랫 사람들 눈치까지 본다. 말수가 적고 소심하지만 내 말을 듣고 은근히 직설적으로 할 말을 다하는 M이 나는 좋다. 뻔하게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나 관심 없는 연예인 얘기를 듣는 것보다 차라리 M과 말없이 조용히 걸었던 그 짧은 순간도 좋다. 


몇 년 전에 나는 무척이나 가고 싶었던 한 회사에 오랜 과정을 거친 끝에 최종 합격이 됐다. 그런데 근로계약서 쓰기 직전에 내가 지원했던 인도네시아 사업이 미뤄졌다는 이유로 채용 취소가 됐다. 그 바람에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패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 겨우 버티며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패배감과 짜증 그리고 원망의 감정이 뒤섞인 스트레스로 평소보다 점심을 더 먹고 다니던 내 옆에 있어줬던 것도 M이었다. 어느 날 M은 나지막하니 나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줬다.


소과장이 없으면 나는 이 회사에서 심심할 것 같아요... 저는 과장님이 오래 오래 이 회사에 다녔으면 좋겠어요


M의 말이 씨가 됐는지 그 이후로도 나는 몇 군데의 타 회사로부터 최종합격선에서 "기다려 달라"라는 연락을 몇 차례를 더 받고나서도 결국엔 채용 취소 통보를 받았다. M은 나에게 몇 개월만 더 버티면 *만원을 받을 수 있고 내년이면 *돈을 받을 수 있으니 여기서 버티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얘기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M에게 그런건 나에게 소탐대실일 뿐이라고... 기회만 되면 얼른 나갈 거라고 M 앞에서 몇 번이고 못을 박았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서 M이 얘기한 몇 개월이 흐르고, 한 해가 지나갔다. 결국 나는 M이 얘기했던 성과급들을 전부 챙겨 받게 됐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나에게 탈출의 기회는 오지 않았고 나는 M과 여전히 한 회사에서 지내고 있다.


심한 결정장애가 있어서 점심 메뉴나 카페에 가도 바로 주문을 못하는 M의 결정을 내가 대신 내려준다. 어찌 보면 M 덕분에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다. 매일같이 회사를 마지막인 것처럼 다니고 있던 나는 회사 주변의 공방에서 퇴근 후 M과 함께 이것 저것 배우고, 인스타그램에서도 유명한 까페 그리고 맛집까지 M과 함께 다녔다. 태어난 연도는 다르지만 생일은 1주일 차이라서 서로 잊지 않고 꼬박꼬박 선물을 챙기게 된다. M은 거의 매년 나에게 '너가 뭘 좋아할 지 몰라서 현금을 준비했어. 알아서 좋아하는 거 사길 바라' 라는 손편지와 함께 돈봉투를 내 책상에 놓고 간다.


이거 받아도 저는 김영란법하고 상관 없는거죠?


라는 내 우스갯소리에 M은 깔깔대고 웃었다.


오랜만에 M과 퇴근 후 저녁을 먹었다. 예전에 우리집 근처에 와서 먹었던 연탄고추장불고기 집은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손님이 우리 둘 뿐 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회사 생활을 하던 나와는 반대로 M은 새로 바뀐 상사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은 것 같았다. 40살까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잘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하던 M에게 나는 그 동안 받았던 위로의 반의 반도 얘기를 해주지 못했다. 그래도 매 달 저녁만큼은 여유 있게 같이 먹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 날 밤에 M의 입에서 단답형으로 들었던 고민들은 내가 감히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날 들었던 M을 둘러싼 환경이나 상황은 배제하고 평소랑 똑같이 M과 지내기로 했다.


6월에는 이번 달보다 돈 더 벌어서 M하고 우리 동네 유명한 소고기집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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