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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y 26. 2020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겪은 후기 1

아래층 아저씨 잘 계실까 궁금하네

7평짜리 좁은 원룸에서 살 때 내 공간이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24평으로 이사를 하니 더 넓어진 공간에 내 물건을 눈에 띄게 정리할 수 있다는 점이 행복했다. 친환경 소재 벽지와 나무를 사용했다고 광고를 하던 R아파트 광고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새집 냄새는 금방 빠졌다. 거실을 확장했기 때문에 원래 베란다였던 위치에서 창 밖을 내다보면 롯데타워까지 훤히 보였다.


하지만 최근에 지어진 집이어도 층간소음 문제와 흡연 문제로 이웃 간에 갈등이 생겼다. 24평이라 내가 살던 동에는 신혼부부가 대부분 살고 있었다. 내 옆집도 2년마다 신혼부부가 들어왔다가 나가고를 반복했다. (그때 신혼부부가 전세 대신 그 집을 샀더라면 좋았을 텐데...)


혼자 살다 보니 퇴근 후에 저녁을 간단히 챙겨 먹고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 갔다. 7평 청소하다가 24평을 혼자 청소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 혼자 사는데도 창문을 열어놔서 먼지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고 여유로운 저녁 7시 30분을 조금 넘겼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는 소화기 전 안에 넣고 가기 때문에 아무도 벨을 누를 사람은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현관 카메라를 통해 누구냐고 물어보니 아랫집에 사는 아저씨였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지만 문을 열고 나가서 본 아저씨는 그냥 덩치 크고 심한 곱슬머리에 안경을 쓴 통통한 백수 아저씨 같았다.


아내가 승진 시험공부 중인데 내가 돌리는 청소기 소리가 아내 공부에 방해가 된다. 저녁 7시 30분 이후로는 청소기를 돌리지 말아 달라  


라는 게 올라온 목적이었다.


내가 칼퇴하고 집에 와도 7시가 좀 넘는다. 그럼 평일에 나는 청소를 못하고 사는 건가?


라는 말을 아저씨 앞에서 못 했다. 그때의 난 지금보다 더 쫄보였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돌아간 뒤에 나는 청소기를 들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화장실에 있을 때 밑에 집 여자 꼬맹이들 3명이서 울거나 소리 지르는 소리가 배관을 타고 전부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아파트니까 그러려니 하며 넘기고 살았다. 하지만 밑에 집 항의를 받고 보니 나만 입 다물고 사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복잡한 생각을 가득 가지고 헬스장에 가서 친한 아주머니께 "저 청소기 돌리면 안 되는 거예요?"라고 여쭈어 봤다. 아주머니께서는 밤 9시가 넘은 시간도 아닌데 무슨 소리냐고 신경 쓰지 말고 청소하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날 나는 평소대로 퇴근을 하고 7시가 좀 넘은 시간에 청소기를 집었다. 그런데 청소기를 돌렸다가 아저씨가 또 쫓아 올라오면 어쩌지?라는 불안함이 들었다. 아저씨가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땐 무서웠다. 결국 그 후로 나는 청소를 주말에 몰아서 하게 됐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하는 내가 트라우마인지 아래층 가족의 얼굴은 또렷하게 기억을 하게 됐다. 여자 아이 세 명을 어린이집 버스에서 데리고 오는 것은 아주머니가 아니라 아저씨였다. 주말 낮에는 아저씨는 큰 백팩을 메고 운동복 차림에 도서관을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승진 시험공부 중이라던 아내분은 퇴근을 하면서 단지 내에서 나랑 가끔 마주쳤다. 작은 체구에 거의 땅만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다니는 그분을 보며 내가 남편이라도 기죽어 살겠다 싶었다.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승진 시험은 떨어졌나 보다 라고 혼자 추측했다.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을 팔자인지 헬스장에 일용할 양식을 틈날 때마다 챙겨서 나한테 갖다 주시는 분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아이스크림 20개를 검은 봉지에 가득 담아서 내 손에 쥐어주셨다. 초등학교 남자아이 2명을 키우는 아주머니께서는 애들 것 사다가 내가 생각나서 조금 더 샀다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콘 아이스크림은 하나도 없고 혓바닥과 입술 색깔을 치명적으로 변하게 하는 아이스크림만 잔뜩 담겨 있었다. 이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나는 밑에 집 아저씨네 집 벨을 눌렀다. 무섭게 생긴 아내분이 시험공부하다가 나오면 어쩌나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다행히 아저씨가 깜짝 놀라면서 맨발로 뛰어나왔다. 아저씨 뒤에 있던 여자 아이들 세 명은 부모를 하나도 안 닮고 정말 귀엽고 예뻤다. 나는 '여름이니까 시원하게 드세요...'라는 짧은 말 한마디 던지고 집으로 왔다.


며칠 뒤 아무도 오지 않아야 할 내 집에 또 벨이 울렸다.

불안한 마음에 발끝으로 총총 뛰어가서 문을 여니 아랫집 아저씨가 손질 하나도 안된 마늘 한 뭉치를 내밀었다. 시골에서 온 마늘인데 막 가지고 온 거라 손질을 못했다. 알아서 먹어라. 아이스크림은 애들이 잘 먹었다 라고 랩 하듯이 빠르게 말씀하시고는 얼굴울 붉히고 돌아가셨다.


그날 밤 나는 거실에 신문지를 잔뜩 깔아 두고 2시간 동안 마늘 손질만 했다. 손에 굳은살이 배겼지만 그 마늘로 주말에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어서 친구를 초대해서 맛있게 먹었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오기 몇 달 전에 아저씨를 분리수거하면서 또 마주쳤다. 1달 뒤에 바로 옆 동인 30평대로 이사하게 됐다고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셨다. 이제는 아저씨가 무섭지 않았던 나는


집 사서 가시는 거예요? 


라고 당돌하게 물었다. 이사 잘하시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아저씨를 단지 내에서 보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청소를 로봇청소기가 쓸고 닦는 것을 담당하고 있다. 핸드폰으로도 로봇청소기 작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청소를 한다. 로봇 청소기가 있음에도 그때 당시 내가 사용하던 청소기를 버리지 못하고 지금 집으로 가지고 왔다. 나는 그 청소기를 볼 때마다 아래층 아저씨가 생각이 난다.


아저씨도 그때 30평으로 이사를 하면서 집을 사셨어야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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