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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n 20. 2020

버스에서 토할뻔한 이야기

힘든 금요일이었다

Y와의 만남으로 미루어졌던 부서 영업 회의는 오늘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남은 2시간 동안 나는 밀린 메일 확인을 하고 외화 들어온 것까지 처리를 끝낸 후 간신히 5시 31분에 퇴근을 했다.


오늘은 힘들어도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금요일이다.

퇴근 후 나는 필라테스를 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시간이니까 버스 안은 여유 있고 지하철 안에서도 앉아서 편하게 집에 갈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후 7시가 넘은 시간에 버스를 타면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볼 수 있는 게 좋았다. 버스 창문을 살짝 열어서 바람을 맞으며 노을을 보는 짧은 그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버스가 도착하기 3분 전에 낯익은 뿔테를 착용한 대머리 아저씨가 등장했다.


어? 안녕하세요? 왜 이제 집에 가세요?

안녕하십니까! 처음으로 사무실 주변 한번 둘러봤습니다!

아... 우리 회사 입사하신 지 얼마나 되셨죠?

이제 6주 됐습니다

직급이 뭐예요?
 
저 사원입니다. 행시 8년 공부하다가 이제 회사 들어왔어요

와!!! 어떻게 8년을 공부하셨어요? 근데 실례지만 나이는....


처음 **부서 막내라고 인사하러 내 책상에 왔을 때 나는 최소 나보다 15살은 많은 차장급이 경력으로 우리 회사에 온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고작 나보다 1살 더 많은 6주 차 사원이었다.


그 사람 (이름을 알려 줬는데 바로 까먹었다. 알파벳을 붙일 수조차 없네......)은 법대를 졸업하고 신림동에서 행시를 8년이나 공부했다고 한다.


그럼 8년을 하루에 14시간씩 공부만 하신 거예요? (외모가 너무 성숙해서 아무리 사원이어도 차마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14시간씩 공부를 어떻게 합니까? 14시간씩 공부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14시간씩 공부하고 5개월 만에 직장 다니는 사람 있어요! 뭐 저야 애초에 공부 자신이 없었으니까 바로 이 회사 들어왔죠 ㅋㅋㅋㅋ

14시간씩 하면 몸 다 망가져요. 안 그래도 공부하면서 몸 엄청 망가졌어요

그럼 하루에 몇 시간씩 했어요?

7시간씩 했어요


그 사람은 모든 대화가 진지했다.

마침 버스가 왔는데 금요일인데도 좌석이 딱 한 개만 남아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자리에 앉혀놓고 나를 내려다보면서 끊임없이 말을 했다.


정말 박학다식한 거 같은데...... 내용이 썩 와 닿지 않았다. 본인은 행시 8년 공부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쪽에 일하는 사람들을 기생충이라고 칭하며 사회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이 사람 얘기를 듣기가 싫어졌다. 어느 조직이든 간에 본인이 그 조직에 몸 담아보지 않고서는 섣불리 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에겐 그 사람의 얘기는 본인의 열등감을 뛰어 넘어서 스스로를 위한 합리화를 하는 것으로만 들렸다.


어쩌면 우리 회사가 기생충 같은 한 인간을 잘못 뽑았을 수도 있겠다.


이런 인간들은 보통 내보내려고 해도 스스로 그만두지도 않던데......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오늘 점심에 뭐 먹었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오늘 점심에 회사 1층에 있던 수제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햄버거는 최악이었다고 한다. 햄버거는 자본주의의 산물 아니냐. 그런데 한 입을 딱 베어 먹은 순간 이 햄버거가 자본주의와 전혀 부합하지 않은 햄버거라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던 행시 공부하던 이야기와 점집을 방문한 에피소드들을 얘기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흔들리던 버스 안에서 내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 정류장이 이렇게나 먼 거리였나? 중간에 내리지 않으면 정말 버스 안에서 토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점집에서는 본인이 행시 합격할 수 있다고 했어요?

합격할 수도 있고 합격 못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게 뭐예요? 그럴 거면 점집에 뭐하러 간대요?

그런 얘기한다고 무당한테 함부로 따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따져서 벼락 맞은 사람들도 있대요. 믿기지는 않으시겠지만!

......


그 사람은 나를 내려다보면서 상식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을 목소리 높여서 빠른 속도로 지껄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 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디 사냐고 물으니 하필 또 우리 집 근처였다. 나는 동행하는 건 이 버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몇 호선 탈 거예요? 6호선? 7호선?

글쎄요... 상황 봐서 6호선 탈지 7호선 탈지 결정하려고요...

(아오! 제발 빨리 얘기 좀 해줘요......)


결국 나는 항상 내리던 버스 정류장에서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다. 그리고, 로드샵에서 10분 정도 시간을 때운 후에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이 어찌나 내 혼을 빼놨는지 살면서 처음으로 계산하고 내 체크카드를 돌려받는 걸 잊어버렸다. 후덥지근한 6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에 나는 지하철역에서 다시 로드샵으로 되돌아가는 해프닝까지 겪었다.


그 사람이 법대에 다닐 때 교수님이 본인에게 "노서입각"이라는 얘기를 해줬다고 한다. 나는 사실 난생처음 듣는 단어라서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또 한없이 길게 설명하고 속으로 내가 무식하다고 욕할까 봐 차마 묻지 못했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면서 "노서입각"이라는 단어도 찾아봤네.


노서입각 : 영특한 늙은 쥐라도 소뿔 속에 들어가면 꼼짝달싹 못한다. (막다른 한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한 공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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