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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n 18. 2020

무럭무럭 성장하는 Y

몸도 마음도 건담 파워야

사실 나 네가 언제 쉬는지 전혀 모르겠어

아... 오늘 쉬는 날 아니세요? 

 그럼! 내가 평일에 쉬는 날이 어딨냐? 너 본다고 휴가 낸 거지. 평일에 여기 오니까 사람도 없고 엄청 좋다. 하루 쉬면 그다음 날에 재충전해서 출근 잘 할거 같지? 전혀 아니야. 오히려 하루 더 쉬고 싶어서 회사 나가기 더 싫다?

ㅋㅋㅋ그래도 내일 출근 잘하셔야죠...

그치, 근데 너는 출근 안 헷갈려? 나만 네 일정이 이해 안 가는 건가?

아뇨! 저도 아직도 제 일정이 이해 안 가서 전부 다 적어놔요. 저도 이해 못하는데요 뭘...


내 주위에 유일하게 요가하는 남자, 요가 소년 Y다. 그날도 Y는 어김없이 요가 수업을 마치고 왔다. 피곤할 법도 한데 얼굴은 나보다 더 쌩쌩한 거 같았다. 분명 요가를 하는데 반팔을 입은 Y의 팔뚝이 엄청 남성스럽다. 일한다고 커진 건지 아니면 요가 말고 따로 운동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우리 회사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팔뚝이라 자꾸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2호선을 코앞에서 놓쳐서 나는 Y와의 약속에 10분을 늦어버렸다. 허둥지둥 온 나에게 Y는 지난번에 본인이 늦었으니 괜찮다고 했다. 나는 딱 10분 늦었는데 Y는 그 사이에 옷 쇼핑까지 했다. 향수와 디퓨저 그리고 바디 용품과 관련해서는 여자인 나보다 훨씬 더 관심이 많은 Y다. 나는 향수 뿌리기 귀찮아서 집에 썩어가는 향수가 몇 개가 있다. 그런데 Y는 꼭 보고 싶었던 향수가 있었다며 이런저런 향수 시향을 한참을 했다. 내 주위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본인이 선호하는 향이 확실한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레몬, 무화과 그리고 라임향을 골고루 다 맡아보았다.


처음 Y를 봤을 때 불구덩이에 잘못 들어온 아기새 같았다고 예전에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Y는 지난번보다 훨씬 성숙해지고 멘탈이 단단해져 있었다. 그동안 뉴스를 보면서 궁금했던 거 몇 가지를 물어봐도 척척 대답을 하고 나에게 전문적인 설명까지 덧붙여서 해줬다. Y는 고작 몇 개월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고, 경험을 통해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몸소 배운 것 같았다.


Y가 "정말 맛있는 거" 먹자고 해서 나는 요즘 핫한 중동 음식점을 생각해 놓고 갔다. 그런데 Y는 이미 음식점 4개를 뽑아서 여기서 나보고 고르라고 했다.


이 넓은 곳에서 네 가지 식당 중 아무거나 하나 골라도 길 잘 찾는 거야?

그럼요! 저 길 잘 찾아요!


나는 회사에서 평소 못 먹는 건강한 음식점을 골랐다. Y는 중간중간 지도를 보더니 음식점을 빨리 찾았다.

나는 연어랑 퀴노아가 들어간 샐러드를 골랐다. 맥주는 Y 것에서 한 모금만 뺏어 먹었다


Y는 오리고기랑 카레향이 배인 브로콜리 그리고 계란 안에 시금치가 듬뿍 들어간 요리를 골랐다


Y는 항상 음식 사진을 찍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를 한다. Y는 지금 직업이 아니면 셰프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는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지난번보다 말수가 훨씬 더 많아진 Y는 일을 하면 할수록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했다. 난 신입 때 내 팀장 욕을 엄청 하고 다녔는데, Y는 지금 팀장님께 정말 많이 배우고 있다고 한다. 워낙 본인 팀장님 얘기를 나에게 들려주니 길거리에서 팀장님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나도 모르게 인사를 하게 될 거 같다.


우리는 남들이 잘하지 않는 얘기도 거침없이 해나갔다.


지난달에 외근 나갔는데 버스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는 거야. 보니까 저 앞에 소방차 몇 대랑 경찰차 수십대가 와 있고 큰 매트까지 깔려 있더라고... 오피스텔에서 어떤 사람이 자살하겠다고 몇 시간째 그러고 있었대

안 죽었을 거예요. 사람은 쉽게 못 죽어요

아냐. 나 너보다 한 살 어릴 때 3살 많은 내 동료가 투신했거든

아... 투신이면 정말 힘들었나 봐요...

회사에 3년 정도 한 자리에 있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정보가 저절로 귀에 들어온다? 근데 나는 듣고 싶지 않은데 그 동료가 어떻게 투신했는지 CCTV에 잡힌 것까지 전부 얘기가 들리는 거야. 그 동료가 뛰어내린 층수랑 내가 살던 아파트랑 하필 또 층수가 같았어. 집에 가서도 계속 머릿속에 생각이 맴돌아서 며칠 밤을 꼬박 잠을 못 잤어. 그때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거든.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봐야 하나 싶은데 혹시나 주위 사람들이 정신병자라고 손가락질할까 봐 병원 근처에 가지도 못했어. 근데 지난달에는 그보다 한참 낮은 층수였긴 한데 뛰어내린다고 하니까 또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 그때 일이 잊힌 게 아니라 그냥 무뎌진 거였나 봐... 지금도 퇴근할 때 버스 타고 그곳 지나갈 때마다 그 사람은 괜찮을까 걱정이 되더라고...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은 쉽게 못 죽어요. 근데 또 되게 어이없이 죽는 게 사람이더라고요.

이 얘기는 회사에서도 금기시됐고 주위 사람들 걱정할까 봐 이제까지 얘기도 못했거든? 근데 이 얘기를 한참 뒤에 너한테 하게 될 줄 몰랐다


Y는 덤덤했다. Y도 사람이니까 감정이 있고 충분히 힘들 텐데 일은 일로써 마무리를 짓는 건지 다소 냉정할 정도로 덤덤했다. 


Y는 이번에 만나기 전부터 내 얘기를 많이 듣고 싶다고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래, 이번에 얘기 많이 하자!"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Y는 이제는 나의 짧은 답변을 더 이끌어낼 줄도 알았다.


이제는 연애도 잘하겠구나 


우리는 자리를 옮겨서 카페에 갔다. Y는 카페도 미리 알아봤다고 한다.


나 따라서 Y도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치즈 모양으로 생긴 치즈케이크인데 부들부들 정말 맛있었다. 내가 사진 찍는다니까 Y는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포크를 X자로 세팅을 해주더라


에어컨이 엄청 빵빵했던 카페에 앉아서 우리는 덜덜 떨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무슨 대화가 될까? 싶기도 할 거다. 하지만 우리 부서 막내보다 한 살 더 어린 Y는 나의 든든한 대화 상대가 돼 주었고, 같이 있는 시간이 전혀 지겹지 않았다.

 

내 삶의 범주를 넓히고 좀 더 다양하게 살고 싶다면 환경을 바꾸고, 시간을 잘 관리하고 그리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방법이 있다.


나는 Y를 통해 내 삶의 범주를 좀 더 넓혀나가고 신선한 자극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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