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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l 05. 2020

어렸을 때부터 나는 외갓집이 좋았다

사랑합니다 다들

외갓집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그래서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이모나 사촌 언니들은 참석하지 않는 외갓집의 행사에 나는 거의 항상 참석했다.

내가 참석함으로 해서 평균 연령은 72.1세로 확 떨어진다. 내가 하는 일은 별거 없다. 그냥 사진 많이 찍어 드리고 동영상을 촬영해 드리는 일이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로 매달 한 번씩 6분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올해는 6개월 만에야 서로 모이게 됐다. 이번 장소는 "임진각 장어집"으로 지난 1월에 내가 필리핀 출장으로 참석 못한 곳이었다. 회사에서도 비싸서 장어 회식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기필코 참석하려고 나는 남아도는 휴가를 냈다. 


임진각은 친구랑 몇 번 놀러 다녔고 DMZ 투어는 해외 거래처 사람들하고 같이 두 번 정도 갔었다. 땅굴도 들어가 보고 전망대에 올라가서 북한도 보고 열차 앞에서 사진도 엄청 찍었었다. 분단국가라는 특성상 거래처에서 손님이 오시면 거의 필수 코스로 방문했었다. 몇 년 전 모습 그대로인 곳을 차를 타고 지나가 보니 나만 세월의 직격타를 맞은 기분이었다. 평일의 날씨 좋은 금요일에 내가 좋아하는 외갓집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엄청 설렜다.


임진각에 장어가 유명하다고 한다. 제대로 된 장어를 먹어본 기억은 회사에서 내 신입사원 환영회 한다고 잠실에 있던 한 장어집에 갔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술버릇 안 좋았던 여자 사수가 거기서 술 잔뜩 먹고 신세 한탄하다가 펑펑 울어서 분위기가 엄청 안 좋았었다. 술을 어찌나 마셨던지 6명이서 먹었는데 100만 원이 넘게 나왔었다. 며칠 뒤에 그 사수는 사표를 냈고, 상무님은 그 후로 다시는 장어집에 회식을 가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일찍 도착해서 식당에서 20분 정도 기다렸다. 장어는 맛은 있는데 생긴 게 좀 흉물스럽다
엄청 오래된 장어집이었다. 주말에는 예약을 무조건 해야 한다고 한다. 2003년 소주 광고 주인공 모델이 자꾸 눈에 들어오네
나를 무서워했던 고양이
비싸서 평소에 잘 못 먹는 장어라 이번 기회에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근데 아무리 봐도 생긴 게 좀 징그럽다
밑반찬은 그냥 시골 반찬. 상추는 바로 딴 거라고 서빙하시던 분이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만원을 손에 쥐어드리니까 반찬 리필이 끝없이 나왔다
원래 없던 반찬인데 서비스로 갖다 주신 게장이었다. 장어보다 게장이 훨씬 맛있었다
장어죽도 맛있었다. 양이 모자라서 좀 더 먹고 싶었는데......
오래된 나무 뒤에 경의 중앙선 철길이 있다. 언제 경의 중앙선 타고 이 곳에 한번 와봐야겠다. 엄청 고생이려나?
벌써 하루가 저물었다
장어 먹고 나서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헤이리 마을까지 왔다. 헤이리 마을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90세가 되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계신 자리라서 특히 내가 언제 결혼을 하는지에 관심이 무지하게 많으셨다.


아.... 올해는 이제 얼마 안 남았고.... 노력해서 내년에는 꼭 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전부 초대해야죠

너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눈을 낮춰서 얼른 결혼해!

저 따지는 거 없어요 고모할머니...

내가 얘 (결혼 안 한 이모)만 보면 심란해. 얘가 그때 ***이 부모한테 인사 가자고 했는데 싫다고 했잖아.

***이요? 요즘 뉴스에 나오는 그분??

어, 뚱뚱해서 싫다고 했어. 그때도 뚱뚱하고 지금이랑 똑같았대

와! 근데 이모도 뚱뚱하잖아요

그땐 네 이모도 엄청 날씬하고 젊었어

와... 오늘 들은 얘기 중에 가장 재밌어요 할머니. 저는 그 정도 분이면 어서옵쇼인데요? 제가 돈 벌고 집안일 다 해도 불평불만 안 합니다 ㅋㅋㅋㅋ


워낙 고령에 아프신 분도 계셔서 다들 다음번에도 다 같이 모일 수 있는지 아쉬워하며 헤어지셨다. 헤이리 마을에서 핸드폰 사진 인화하는 곳이 있어서 단체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한 장씩 인화해서 손에 쥐어 드렸다. 나한테는 별 것 아닌데, 할아버지 할머니 입장에서는 어떻게 방금 찍은 사진을 바로 가지고 왔냐고 다들 놀라워하셨다. 재미도 없었을 텐데 휴가까지 내서 와줘서 고맙다고 새벽에 장문의 카톡을 보내주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벌써 그립다. 기회 되면 또 휴가 내고 찾아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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