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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l 17. 2020

정확히 11년 됐다

이 회사에서 뼈를 묻기는 싫은데~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나는 한 회사에 면접을 보기 위해 골목길을 들어섰다.


사실 나는 그 전날 서울에서 가장 땅값 비싼 곳에 위치한 한 회사에 이미 최종 합격이 됐다.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면접을 보러 가는 대신 7평짜리 원룸에 누워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며 뒹굴거리는 거였다.


하지만 지방에 계시던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최종 합격한 그 회사보다 이번 회사가 연봉이 100만 원이 더 높으니 무조건 그 회사에 가서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이 되든 안 되는 면접비라도 받아서 오라고 하셨다. 엄마는 어딜 가나 힘들게 일하는 건 비슷비슷하니 조금이라도 월급이 많은 곳에서 일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나보다 더 앞 세대의 경우 면접비가 꽤나 짭짤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면접 보러 다니던 그 당시에는 경기가 무척이나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현재 역병 시국보다는 나았다) 면접비를 주는 곳은 거의 드물었다. 고작 만원을 받기 위해서 불편한 구두와 정장 차림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하루를 또 긴장상태로 보내기 싫었다. 하지만 엄마는 전화와 문자메시지 그리고 네이트온으로 집에서 퍼져 있지 말고 꼭 면접을 보고 오라고 하셨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걸어놓은 정장을 다시 꺼내 입고 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무지하게 더웠던 7월의 어느 여름날, 나는 지하철 안에서 면접 보러 가는 회사에 대한 정보를 홈페이지로 한번 훑어봤다. 대학교 4학년 때 알바 포함해서 이력서만 200개 정도 넣었을까? 그중에 면접은 5~60번 정도 봤었던 것 같다. (모의고사처럼 하나뿐인 수능을 위해 대부분의 면접은 가리지 않고 봤다. 그런 과정에서 서울 토박이보다 서울의 지리를 더 꿰뚫을 수 있었다. 용산에서는 길을 잘못 들어서 정장 차림으로 사창가도 왕복으로 왔다 갔다 했었다. 누가 봤으면 그곳으로 면접 보러 온 줄 알았겠다......) 이미 합격한 회사가 있으니 나는 평소처럼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몇 가지 면접 질문에 있어서 성차별적인 질문이나 상식 이하의 질문도 몇 가지 있었다. 심지어 내가 흡연자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캐묻기도 했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 앞에서 전혀 기분 나빠하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항상 그랬듯이 내게 주어진 그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해서 면접을 봤고 면접비 2만 원이 든 봉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나름 큰일을 치렀다고 생각했는지 배가 많이 고팠다. 점심은 집에 가서 푸라면에 계란 두 개 넣고 먹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회사로부터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다.


그런 건 회사에서 나서기 전에 미리 얘기하지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냐며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나는 왔던 길을 서둘러서 되돌아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회사로 다시 돌아가서 인사기록카드를 작성하고 매 달 24일마다 월급으로 얼마를 받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월급은 생각보다 많았고 이제 내 생활비 때문에 부모님한테 손 벌리는 일도 없겠구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엄마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나는 내 몸에 불편한 정장과 구두를 신은 채로 길에서 삐끗했고 내 오른쪽 다리는 순식간에 눈에 띄게 퉁퉁 부어버렸다. 하마를 가까이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하마 다리가 이 정도일까? 왼다리와 오른 다리를 비교해보니 오른 다리는 정말 하마나 코끼리 다리가 돼 있었다. 결국 나는 면접비 2만 원을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인대가 늘어난 다리를 깁스하는데 몽땅 써 버렸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내 편이었다면 내 다리몽둥이를 못쓰게 만들어서 이 회사 입사를 다시 고려해보라는 경고 메시지였나 보다


이틀 뒤 입사를 해 보니 내가 소속된 이 부서는 해외사업을 시작한 지 2년도 안된 신설 조직이었다. 그러다 보니 회계나 자금 그리고 출고까지 해서 해외사업만을 위한 세팅을 신입사원인 내가 처음부터 해 나가야 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일을 배워나가는 동시에 일을 하나씩 끝냈다. 연봉이 100만 원이 적었던 그 회사는 집에서 거리가 가까웠고, 이미 해외사업을 시작한 지 꽤나 오래된 회사였다. 나는 1년에 100만 원을 더 준다고 이 회사를 선택한 것에 후회를 정말 많이 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외근이 많아서 걸을 때마다 아직 낫지 않은 인대가 쿡쿡 쑤셨다. 20대 초반의 내 파릇파릇한 오른쪽 다리의 인대와 맞바꾼 회사일은 그 이후로도 꽤나 고달팠다. 금요일 저녁에는 제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었고 일요일에 점심을 먹고 나면 그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증이라는 것도 생긴 것 같았다. 남자 친구와 만나면 좋은 얘기보다는 매일같이 일이 힘들고 회사 나가기 싫다는 얘기를 그에게 하소연했다.


남자들이 많아서 다소 딱딱한 분위기 속에 나도 군대 왔다는 기분으로 2년은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1년을 버티자 지금의 상무님과 사장님은 나를 데리고 당시 올림픽 공원에 있던 프랜차이즈 뷔페에 데리고 가서 실컷 먹으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2년 그리고 3년 차까지 내 입사일에는 나도 원치 않는 회식을 하던가 아니면 사무실 안에서 케이크를 자르며 축하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동료의 죽음, 세무조사로 3억 5천을 추징당할뻔한 사건, 비상경영으로 월급을 연말에 한 번에 받은 일 그리고 피싱 사건 등으로 때려치우고 싶은 적이 참 많았다.


11년 동안 공백 한번 없었던 노동의 삶을 되돌아보면 나는 정말 교과서적인 노동 생활을 해왔다.

나의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월급을 받고, 이 월급으로 할부 한번 없는 소비생활과 매달 비슷한 금액의 저축 등의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신생아 조직에 뭣도 모르고 들어와서 일을 하다 보니 동일한 직급에 비해서는 내 존재를 인정받는 기회도 빨리 생겼다.


무신론자인 나에게 신은 네가 버틸 만큼의 시련을 주시는 거야 라는 말을 했던 한 이사님의 말을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한다. 힘듦의 기준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래저래 힘들었다고 외쳐도 더 능력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월급을 거저먹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내 브런치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회사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소재를 가지게 된 것도 남들보다는 다소 특이한 경험이나 일을 했기 때문은 아닐까?


회사 이야기는 더 안 써도 되니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의 회사원 생활이 물 흐르듯 흘러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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