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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l 16. 2020

내 이름이 불릴 때

김춘수의 시를 이제야 이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이름이 한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이름이 언제 어떻게 지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 이름은 지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오빠를 낳을 때 별 이상이 없었고, 엄마는 그 당시 우유값이 모자라서 병원에 가는 비용도 아까웠다고 한다. 큰이모께서 엄마께 병원에 가는 비용을 아끼지 말라고 그 당시 아빠 월급의 5배를 손에 쥐어주고 가신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돈을 전부 저금하셨다. 엄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내가 태어나고 나서야 내 성별을 알았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꿈에서 산길을 걸었다. 산길을 걷는데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서는 엄마 배를 가리키면서 "네 뱃속에 있는 아이는 여자 아이다"라고 얘기를 했다고 한다.


여우의 정체가 뭐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우 말대로 며칠 뒤 새벽에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할아버지께서는 엄마를 불러서 이름 두 개 중에 마음에 드는 이름 하나를 고르라고 하셨다. 엄마는 두 이름을 보자마자 절망하셨다. 도저히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를 수 없었다고 했다. 두 이름 전부 밑에 받침이 없고 너무도 흔한 이름이어서 엄마는 딸이라서 이름을 아무렇게나 짓나 라는 생각에 실망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엄마는 지금의 내 이름을 선택하셨다. 왜냐하면 두 이름 중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하나의 이름이 엄마가 국민학교 다닐 때 본인을 무척이나 못살게 굴었던 여자 아이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부모님은 내 이름 대신 애칭으로 나를 부르셨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이 내 애칭을 듣고 조금씩 불편해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부모님께 애칭 대신 내 이름을 불러달라고 요청드렸다. 이름 때문에 초등학교 때 놀림도 많이 받아서 나는 학교에서 남자 애들도 많이 때렸다. 다소 불만이 많은 이름이었지만 이름을 바꿀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서울에 와서 영어 학원을 다닐 때 원어민 선생님은 내 이름 그대로 영어 이름으로 사용하라고 하셨다. 내 이름은 받침이 없기 때문에 전 세계 누구라도 쉽게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회사에 입사해서도 해외 거래처분들은 전부 내 이름을 쉽게 외우고 무난하게 부를 수 있었다. 20대 중반에 중남미와 일을 하게 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남미 거래처분들 사이에서 스페인어식 내 이름이 생겼다. 그 이름은 바로 한국어 이름에 '~ya'만 붙인 것이었다. 실제 그 이름은 중남미에서 흔한 이름이고 그 이름으로 굉장히 유명한 스페인 가수가 있다. 할아버지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는지 받침도 없는 이름을 지어주신 덕분에 나는 내 한국 이름으로 해외 거래처와 일을 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다소 딱딱한 직함으로 불리지만 해외 거래처 사람들과 일을 할 때면 나는 친근하게 불리는 내 이름을 항상 보고 들을 수 있다. 신규 거래처와 일을 할 때 "Dear Sir"로 메일을 처음 받았다가 내 소개 후 다시 "Dear Sorita" (실제 영어 이름은 Sorita가 아니다)로 불리게 되었을 때 나는 상대방에게 그제야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느낀다.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을 지라도 메일에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심리적인 거리는 훨씬 가까워지게 된다. 상대방 역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진정한 관계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나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고 부른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이자 그의 본질에 맞는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예상치 못하게 내 이름이 불릴 때 때때로 설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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