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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l 19. 2020

오랜만에 고전 읽기

더위 먹었나 봐 오늘 너무 피곤해서 방콕 상태로 책 읽기

엄마는 오빠와 내가 어렸을 적에 고전을 읽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엄마는 생활비를 아껴뒀다가 아빠 몰래 문학전집을 잔뜩 사서 좁은 집에 꽂아 두셨다. 가끔 아빠가 얼마 주고 샀냐고 물으시면 엄마는 실제 가격의 50%를 낮춰서 대답을 하시는 것 같았다. 관사에 사는 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가계부를 쓰시며 돈 관리를 하시던 엄마는 나에게 책 사줄 돈은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관사의 위치가 다른 아파트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집에 찾아오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친구들이 집에 오면 엄마는 집밥을 잔뜩 하셔서 내 친구들과 나를 위해 밥상을 차려주셨다.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는 회수권을 주시거나 차비를 쥐어 주셨다.


친구들이 집에 컴퓨터 하나씩 있을 때 우리 집에만 컴퓨터가 없었다. 엄마는 오빠의 교육상 컴퓨터를 집에 둘 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아는 오빠는 이미 PC방에서 컴퓨터로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았다. 물론 엄마도 알고 계셨겠지만 모른 척하셨을 거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PC방에 간 적은 2번 정도였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외고 입시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특수대학 시험 전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 컴퓨터도 없었던 나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 반쯤 누워서 책을 읽으며 무료함을 달래곤 했다.


친구와 많은 소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컴퓨터로 더 넓은 세계를 접해보지 못했던 그 당시의 나는 꿈을 이뤄야만 나의 삶이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어렸던 나의 꿈은 딱 하나였다. 절대 평범한 회사원이 되지 않겠다는 거였다. 회사원에 대해 딱히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그 당시보다 좀 더 재미나고 더 큰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결국엔 돌고 돌아서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 됐다. 그리고 성인이 된 나는 깨달았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사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평범한 회사원으로 사는 것을 중년의 나이에 거부하고 현실에서 도피한 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고전을 오랜만에 다시 책장에서 꺼내 읽었다. 바로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런드다. 어렸을 적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스트릭런드가 본인의 꿈을 위해 도전하는 모습이 대단하고 멋있어 보였다. 내 꿈도 파리의 길거리 화가였기 때문에 스트릭런드가 화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것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오늘 오후에 첼바 원두로 내린 커피를 한잔 마시며 성인이 된 내 관점에서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어보니 막장 소설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주인공 스트릭런드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이기주의의 끝판왕이자 괴물이다. 가정을 버리고 본인의 꿈을 찾겠다며 떠나버린 스트릭런드는 남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부끄러움이 전혀 없다. 심지어 병이 났을 때 도와준 친구에게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이런 인간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잔인한 인간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악마에게 홀린 것처럼 예술에 몰두하는 모습은 비장하고 처절하다. 좋게 얘기하면 예술지상주의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임과 동시에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인간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고전을 많이 읽은 경험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그 당시엔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의미지?"라고 생각했던 내용도 성인이 돼서 다시 읽어보니 그 내용이 이해가 되거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고전을 재해석할 수도 있었다.


고전이든 현실 세계든 한 인간을 평가함에 있어서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공들여 써온 삶의 서사가 한순간에 무너진 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에 살지만 지지자들에 밀려서 멀리서 딱 한번 바라만 봤던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아니면 본인의 행동이 성추행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


이번 사건은 마치 내가 어느 고전 속 한 장면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해 준다. 죽음으로서 보여준 그의 한계가 결국 개인적인 한계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사회는 이제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요 며칠간 나는 여러 사람들의 위선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똑똑한 줄만 알았던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이 사회를 어떻게 굴러가게 했는지의 과정을 보았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앞으로의 수사 과정도 흥미롭게 지켜볼 것이다.


고전 속 스트릭런드는 단순히 한 개인을 지칭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꿈과 그가 추구했던 가치만을 최상위에 두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온갖 민폐를 끼쳤던 그의 모습은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기성세대들은 반성의 움직임도 보인다. 한 개인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세대의 한계와 어리석음이었음을 깨닫는 움직임은 마치 스트릭런드가 죽기 전에 남긴 불가사의한 벽화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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