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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Aug 26. 2020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긴 신호 기다리는 게 가장 힘들어

아악 젠장!!!!

왜요 왜요? 지하철에 뭐 놓고 내렸구나?

아뇨. 우리 지금 무단횡단하고 있잖아요!!!!

네, 여기 신호가 너무 많아서 상황 봐서 난 무단횡단해요. 무단횡단 안 해봤어요?

네, 절대 안 합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참 올바르게 살았네요......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길에서 비명 질러요? 엄청 놀랬잖아요!!


K랑 나는 출근 시간이 계속 겹친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표 찍는 입구에서 K가 두리번거리면서 나를 찾는 게 눈에 보인다. 내가 세상에서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가 길가면서 핸드폰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내가 K랑 같이 안 가려고 혼신의 연기로 꺼진 화면의 핸드폰을 보면서 지하철 입구까지 K를 못 본 척, 모른 척하며 걷는다. 하지만 K는 항상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나한테 먼저 인사를 하니 매정하게 모른 척하고 회사랑 정반대의 출구로 나갈 수도 없다.


우리 회사 근처에는 유난히 신호등이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인을 하고 무단횡단을 한다. 심지어 차도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들어왔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갈 때가 많다. 그래서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졌더라도 양쪽을 잘 살피고 건너야 한다. 변명 같지만 군중심리에 이끌려서 나도 가끔은 사람들이 빨간불에 건널 때 같이 무단횡단을 한다.


횡단보도에 빨간불인데 지금처럼 우리가 건너다가 사고가 나도 우리가 책임이 있죠?
 
있죠!

그럼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들어왔는데 사고가 나면 보행자 책임은 없는 거죠?

아니에요. 그게 비율이 다른데 보행자도 책임이 있어요

난 횡단보도에서 건너고 파란불임을 확인했는데도 차에 치였는데 나도 책임이 있다고요?

그게 책임 비율이 있습니다

몇 대 몇인데요?

가장 정확한 건 보험사에서 알아요. 보험사에 물어보세요

 ......


박학다식한 K한테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답변이 썩 명쾌하지 않을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것이 시험에 합격한 자와 아닌 자의 차이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어렵다는 5급 시험에 나는 감히 응시할 생각도 안 해봤으니 명문대를 나온 K를 깔보지는 않는다. 아마도?


어색하게 흐르는 공기가 싫어서 나는 K에게 주말에 뭐하냐고 물었다. 연애 상대를 찾아보려고 알아봤던 자전거 동호회는 비용 때문에 깨끗하게 포기했고 대신 돈 안 드는 집 앞 등산을 매 주말마다 혼자 간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도 대학교 때 교수님과 연락을 하면서 논문도 한 편 쓰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대단하네요. 난 졸업하고 취업하자마자 학교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는데......

전 교수님하고 친해요 머리 굳기 전에 공부 좀 더 하고 논문도 써보라고 해서 얼른 써야 하는데 주말에 업무 관련 공부도 해야 해서 짬이 안 나네요

도로주행 연습은 다 했어요?


K는 도로주행도 20시간 넘게 연습을 해서 9월부터는 자차로 출퇴근을 할 거라고 했다. 이제 K와 출근길에 마주칠 이 며칠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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