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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Sep 04. 2020

재택근무와 순환근무의 일주일

역병 속에서도 할 일은 하고 돈 벌어야지

11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재택근무와 순환근무의 한 주를 보냈다.

역병에 걸리는 건 이제 시간문제인 것 같은 이 시국 속에서 재택근무와 순환근무 그리고 짬짬이 외근을 다니면서 나는 노트북을 항시 들고 다니게 됐다.


화상회의는 몇 년 전 이직 때문에 이미 몇 번 해봐서 나에게는 익숙했다. 그때 최종까지 못 가서 자책하며 시간낭비에 헛수고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다 뜻이 있어서 이미 경험을 했던 걸까? 화상회의는 첫날부터 차질 없이 진행이 됐다. 주 1회 하던 회의를 매일 하게 되고,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을 모니터 화면 안에서 부담스럽게 마주 보니 무척이나 매일매일이 곤욕이다. 하지만 집에서 업무를 하니 중간에 아빠 커피도 타다 드리고, 졸리면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러 갔다 온다. 이런데도 월급이 아직까지 깎이지 않고 교통비까지 나온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일 업무보고서도 제출해야 하고 DHL이나 UPS아저씨 그리고 퀵 아저씨들까지 우리 집으로 방문을 하는 게 너무 낯설다. 모르는 남자가 집에 오는 게 싫어서 배달음식도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시켰다. 그런데 이 시국에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누군가가 집에 들어오는 게 싫다. 그래서 지하 1층에서 출입문 초인종이 울리면 내가 현관문 밖으로 나가서 우리 집 층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서 일을 끝낸다.


내 방에서 일을 하고 쉬다 보니 내 방 환경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한데 모여 있던 필기구를 볼펜과 볼펜이 아닌 나머지 필기구로 명확히 나눴다. 그리고 나의 사적인 주간일정 계획서에는 더 이상 사적인 것은 없다. 빽빽하게 회사 일정과 관련하여 뭐가 많이 쓰여있다. 회의 시간이 9시가 됐다가 10시로 바뀌고 15시에도 있을 때가 있고 업무 마무리하는 시간인 17시에는 항상 회의가 있다. 이 회의 중 하나라도 빠지거나 늦으면 바로 휴가 처리가 된다는 지침에 정신을 잘 차려야 한다.


어느 때보다 맑은 하늘 속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게 좀 억울하기는 하다. 하지만 먼지와 사람들 많은 서울에서 원래 마스크를 종종 착용했던 나는 다 같이 위생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 다만 이렇게나 조심했는데 자칫 한순간에 역병에 감염될 수도 있다는 게 두려울 뿐이다.


우리 부서 내에서는 자체적으로 다른 부서와도 교류를 끊었다.

그런 와중에 며칠 전 퇴근길에 옆 사무실 K가 또 등장을 했다. 


아, 퇴근하십니까?

네, 근데 저 친구 만나러 가야 해요 (사실 만날 친구가 없었다)

아... 부럽습니다

그럼 들어가요~ 난 늦어서 이만......


K를 뒤로 하고 나는 사무실 근처 스타벅스에 가서 샌드위치와 블루베리 요구르트를 사서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코 앞에서 지하철을 아쉽게 놓치고 8분 뒤에나 지하철이 온다는 전광판 아래서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낯익은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 막내 S랑 K가 번갈아가면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과장님, 앞 차 놓치셨나 봅니다

어, 코앞에서 놓쳤어. K 씨는 왜 이제야 가는 거예요?

아! 구두 닦고 왔습니다


K는 발 한쪽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정말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 있는 구두였다. 밖에서 구두 닦는 사람은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마침 지하철이 들어왔고 우리는 스크린도어 앞에 일렬로 섰다.


나 :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부서 지침에 따라 우리 전부 떨어져서 앉아야 해

K :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지하철에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구석자리에 앉자마자 K는 내 바로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으려고 했다. 그 순간 막내 S는 눈치껏 건너편 자리로 가서 묵묵히 앉았다. 그 모습을 힐끗 보던 K도 바로 일어나서 S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KF94 마스크를 최대한 얼굴에 조여놔서 웃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떨어져서 앉자고 해놓고도 이 상황을 마주 보고 있자니 매우 웃겼다. 결국 나는 마스크 안에서 빵 터졌다. 내 앞에 누군가가 서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없었다.

 



이번 주 내내 사무실 안에 근무하는 최소 인원은 4명 이하였다. 나는 이 환경이 참 좋다. 조용하게 일을 할 수 있고, 프린터기 안에 내용물이 섞일 일도 없다. 매일매일 회의를 하고 업무를 체크하니 뭔가 더 타이트하게 일이 진행되지만 속도 역시 빠르다. 게다가 마스크 쓰지 않는 내 방 안에서 문 닫고 일 하다가 회사 점심시간과 동일한 시간에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면서 드라마 앨리스를 보는 것도 즐겁다. 다음 주까지 재택근무와 순환근무가 연장된다고 하니까 9월은 좀 더 긍정적으로 파이팅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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