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간방 박씨 Aug 13. 2020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궁금해서

억지로 빗어 넘긴 머리 약한 모습이에요

행정고시 왜 그만뒀어요? 공부한 시간이 아깝지 않았어요?


나도 한 때 공무원을 꿈꿨던 때가 있긴 있었다.

아빠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어 본인처럼 정년퇴직을 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길 바라셨다. 딱히 어느 회사에 취업을 해서 어떻게 살고 싶은 생각이나 계획도 없었던 나는 공무원 시험에 대해서 찾아봤다. 그리고 시험 내용을 몇 번 훑어보기는 했었다. 그러다가 아빠의 이상적인 바람처럼 '전공, 복수전공과 공무원 시험을 병행하기에는 나한테 너무 버겁다'라는 빠른 결론을 내리고 사기업 취업으로 눈을 돌렸다.


나도 아주 잠깐 새끼발가락 정도를 공무원 시험에 담가본 사람으로서 K의 행시 이력이 궁금했다. 오늘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내리니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마침 뒤를 휙 돌아보길래 내가 한 손을 들어서 인사를 하니 K는 허리를 굽혀서 내 인사에 답했다.


K는 지난번보다 말수가 훨씬 많아졌고 아직까지 긴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K는 행시를 접고 신림동에서 8년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사연이 있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K가 기약 없는 행시를 접고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K는 8년 동안 행시에 매달린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만약 자식이 행시를 준비하겠다고 한다면 본인은 말리지 않겠다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8년이라는 시간은 사람마다 상대적이구나 싶다. 


고시원에 가득했던 책들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K는 마구잡이로 이력서를 뿌렸다. 그리고 첫 직장으로 대전에 있는 '~연구원'에서 근무를 했다. (처음 들어보는 곳이라서 회사 이름을 듣자마자 까먹었다. 대전은 성심당 튀김소보로밖에 몰라서......) 그때 서울에서 대전까지 매일 KTX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고 한다.


일하는 곳까지 얼마나 걸렸어요?

2시간 걸립니다. 엄청 되요

월급은 많이 줬어요?

아니요... 월급 엄청 짰어요

그럼 교통비는 줬어요?

교통비는 당연히 안 줬죠

그럼 월급 남는 것도 하나도 없었겠네요


K는 매일같이 대전에서 야근을 하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K는 일이 너무 '되서' 여의도에 있는 또 다른 '~ 연구원'으로 이직을 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밤낮없이 일을 했다. 몸 상태가 안 좋아지던 것을 느낀 K는 그 회사에 사표를 내고 우리 회사로 세 번째 이직을 했다.


나는 11년 동안 단 한 곳도 이직을 성공하지 못했는데 K의 역량이 대단한 건가 싶기도 하다.


K는 대화를 하는 와중에 '되다'라는 사투리를 참 많이 썼다.

엄마가 경상도 사람이라 망정이지 우리 부서의 해외 입국자들이 들었으면 K가 하는 말의 반의 반도 이해 못했겠다 싶다.


지난번 버스 안 전광판에서 나오던 한 줄짜리 기사를 보고 K한테 궁금한 걸 질문했었다. S대 법대 출신에 8년이나 법만 외웠으니까 내가 궁금한 건 대답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명쾌한 답이 아니라서 내가 질문의 질문을 거듭하자


아니 저 형사소송법은 공부 안 했어요!

라고 민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오늘 본 K의 민머리는 단정하게 이발이 돼 있었다.

항상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할아버지들처럼 애써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빗질해서 넘기지 말고 차라리 시원하게 밀어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은 머리를 박박 깎은 젊은 남자들도 많고, 이런 스타일이 오히려 더 깔끔해 보인다. 우리 동네 재개발 예정 지역 안에 있는 매점과 복덕방을 같이 하시는 사장님 같은 헤어스타일이 볼 때마다 눈에 띈다. 


K는 사무실로 가는 길에 보이던 소방서를 보고 인구가 100만을 넘어가면 소방서가 2개,  그 이하이면 1개가 설치된다고 했다. 나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K가 지금까지 공부했던 잡다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부서로 갔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Y군의 팀장님은 Y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곳은 학벌이 크게 중요치 않으니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배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초, 중, 고 그리고 대학교까지 열심히 공부를 했나 때로는 허탈하기도 하다. 하지만 Y군의 세계와 사기업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힘들게 들어온 회사에 적응을 해야 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reset이 된다. 잘 버티고, 업무를 잘 익히고 본인의 스펙과 역량을 다시금 차근차근 쌓아가야 한다. K의 사수한테 평을 들어봐야 더 정확하겠지만, 멀리서 가끔 보는 K의 모습은 나름 잘 버티려고 노력하고 업무에도 열심인 것 같다.


자전거 동호회는 비용이 너무 비싸서 등산 동호회로 눈을 돌렸다는 K한테도 얼른 좋은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 본 것과 안 해본 것의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