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간방 박씨 Aug 21. 2020

회사 다니면서 싫은 것 중 하나

좋아하는 건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어도 싫어하는 건 명확한 이유가 있어

회사 다니다 보면 싫어하는 것이 몇 가지가 생긴다.


사실 회사에서 짜증 나던 것은 수십 가지였는데, 다니다 보니 내공도 많이 쌓이고 나 스스로가 마음을 많이 내려놓으면서 이제는 손에 꼽을 정도로 단점을 몇 가지로 줄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그 몇 가지 안 되는 단점 중 하나가 유독 2주에 한 번씩은 생기는 것 같다.


그건 바로,

착불로 오는 다른 부서의 퀵을 내가 대신 받아주는 거다.


퀵 아저씨는 서류를 가져다주면서

이거 착불 서류입니다

라는 얘기를 친절하게 먼저 꺼내지 않는다.


일단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서류를 들이밀고 받은 사람 이름을 빨리 적게 한다.

일반적인 퀵이라면 서류를 건네주고 바로 떠난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착불로 퀵이 오면 사인을 한 사람이 돈을 내야 한다. 요즘은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만원 이상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다들 돈을 빌린다. 2~3만 원의 돈이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돈이기도 하다.


요즘 들어 내 대각선으로 건너 건너 건너편에 앉은 29살 막내 책상으로 낯익은 뒤통수가 얼쩡거리는 게 자주 보였다.


S 씨, K랑 많이 친해졌나 봐?

아! 아닙니다... 나이가 저보다 훨씬 많아서 친해지기가 좀...
 
친해지기 쉽지 않은 사람이지? 나도 그래

네, 좀 어려운 분이더라고요

근데 왜 자꾸 네 자리로 오는 거야?

착불로 퀵을 받는데 현금이 없다고 빌리러 오네요 하하

이제까지 빌려준 건 돈 받았어?

아 네 뭐... 처음에 빌려간 건 받았고 오늘 빌려간 돈은 내일 준다고 하네요...


나는 신입이었을 때 나보다 나이 많은 선임들이 돈 빌려가면 그 돈을 받을 때까지 마음 쓰이곤 했었다. 사무실 막내 S를 보니 한참도 더 전의 그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까짓 돈 얼마 안 하는데 못 받아도 상관없다고 순진하게 웃는 막내의 얼굴을 보니 더 마음이 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을 막 지났을 무렵 퀵 아저씨가 내 사무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걸 봤다. 퀵 아저씨가 들고 있던 서류를 힐끗 보니 옆 사무실 K의 이름이 크게 적혀있었다.


아저씨, 이 서류 옆 사무실 거예요

예, 아는데요... 문이 잠겨 있어서요...

아.. 이리 주세요!

네, 여기 성함 쓰시고 착불입니다

......


나는 항상 비상시 현금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착불도 상관없다. 다만 전제는 착불도 우리 부서의 경우일 뿐이다. 내가 우리 부서 비용으로 처리하고 추후에 내 통장으로 받으면 되니까 전혀 부담이 없다. 하지만 옆 사무실, 그것도 요즘 수시로 퀵 때문에 우리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는 K 것이라고 하니까 심보가 살짝 뒤틀렸다.


아니, 이 사람은 왜 본인 부서에서 돈을 안 꾸고 자꾸 남의 부서로 와서 돈도 빌려 가는 거야? 서류받을 때 제때 있기나 하던가... 점심시간도 지났는데......


서류를 내 책상 옆 캐비닛 위에다가 두고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사무실 벨을 눌렀다. 막내가 리모컨으로 문을 여니 K가 숨을 헐떡이며 문 앞에서 두리번거렸다.


(서류를 높이 들어 보이며) 퀵 서류 찾죠?

아 네... 착불이었을 텐데....

내가 돈 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기 돈 드릴게요 


K는 파란색 긴 와이셔츠 소매를 돌돌 말아서 반팔로 만들어 입고 있었다. 이럴 거면 반팔을 입지 올여름은 긴팔 와이셔츠를 고집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파란색 셔츠라서 등에 흥건한 땀이 더 돋보였다. 게다가 머리가 땀으로 젖어서 뒷머리가 찰싹 달라붙은 것을 보니 점심 먹고 급하게 온 것 같았다. 나쁜 사람도 아닌데 속으로 욕하지 말아야지. 좀 짠했다. 그런데 서류를 건네주며 "수고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내 말에 K는


네, 열심히 하세요


라는 말을 내뱉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서둘러서 돌아갔다.


아니, 지가 뭔데 나한테 열심히 하라 마라야!!!!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나보다 한 살이 많지만 고작 입사 3개월 차 인턴 (우리 회사는 입사하면 3개월 인턴을 거친다) 한테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누구한테도 듣지도 못한 나름 신선한 충격이라서 그런지 그 날 오후엔 K에 대한 생각을 좀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탕비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내린 결론은,,,


아마도 K가 고시생활을 하면서 같은 고시생들끼리 잠깐 잡담하다가 다시 공부하러 들어갈 때 서로 주고받던 인사가 "열심히 하세요"가 아니었을까?


'8년을 입에 달고 살았으면 회사에서도 본인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을 수도 있겠다'라는 결론을 나 스스로 내려봤다.


그리고 오늘,

출근도장을 찍고 문을 열려는 순간 나를 스치며 옆 사무실로 들어가던 K는


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합시다아!


하고 내 쪽으로 한 손을 들어 보이더니 본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누가 보면 한 20년 차 만년 부장님인 줄 알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 근처 서점 탐방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