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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Aug 22. 2020

쇼부보기

좋게 좋게 좋게 생각하는 중이다

올해 초 내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나는 한 달 뒤 영국에 갈 일정을 짜고, 다른 사람들이 올려놓은 여행기를 읽으며 설레는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영국항공을 취소했다.

사장님께서 주신 비행기 티켓 두 장이라는 귀한 선물을 어쩔 수 없이 날려야 했다.

그리고 나는 플랜 B로 호캉스를 계획했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

영국항공 직항 티켓 2장 정도의 가격으로 아빠 엄마랑 셋이서 롯데호텔 시그니엘이나 신라호텔에서 묵고 싶었다. 두 호텔 다 가보지 않았는데 언제 한번 꼭 가보고 싶은 두 호텔이었다. 왜 굳이 비싼 호텔을 선택하냐고 물으신다면 집보다 못한 호텔에 묵는 것은 돈과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안에 소진을 해야 하는 인센티브 건이었기 때문에 나는 상무님께 면담 신청을 했다. 우리는 서로 바쁘기 때문에 날짜와 시간을 잡았다.


우리가 보기로 한 그 날,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그 날 오전에 회의를 마치고 부랴부랴 사무실로 들어왔다. 상무님과의 약속 시간이었던 오전 11시를 5분 앞두고 나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나를 본 E대리는


상무님 방금 나가셨어요 


라는 어이없는 상황을 나에게 전달했다.


사실 상무님은 불편한 얘기나 면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기 싫고 어려운 일 그리고 불편한 상황을 먼저 해소하는 걸 선호하는 나와 달리 우리 상무님은 기피형이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불편한 말을 절대 꺼내지 않는다. 항상 제삼자를 통해서 당사자에게 전달하게 하는 분이다. 그런 분께 평소 면담 신청을 하지 않는 내가 얘기 좀 하자고 하니 상무님은 피하고 싶으셨나 보다. 나는 상무님께 바로 전화를 했다.


어~ 소과장! 내가 지금 막 지하주차장에 왔어

아! 아직 이 건물에 계시는 거네요! 제가 내려갈까요? 1분이면 얘기 끝날 거 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내일 얘기하자


결국 나는 서둘러서 사무실에 온 보람도 없이 그다음 날 상무님과 면담을 하기로 다시 약속을 잡았다. 할 말이야 이미 다 머릿속에 정리해놨으니 상무님이 어떻게 나올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약속한 그 시간에 나는 상무님께 차 한잔 하자고 했다. 평소 드시던 대로 율무차를 타서 드렸는데 물 양이 평소보다 많다며 다시 타 올 수 있겠냐고 부탁하셨다.


내가 율무차에 뭘 더 넣을 줄 알고 다시 타오라고 시킨대......


막상 다시 타오라고 시켜놓고도 본인도 찝찝했는지 내가 다시 타 온 율무차를 한 입도 마시지 않았다. 내가 철부지 어린애도 아닌데 율무차에 침이라도 뱉었을 거라고 의심이 들었나 보다.


우리는 짧은 대화 끝에 취소된 항공권 티켓은 현금으로 받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항공권 티켓 금액의 50%만 현금으로 주겠다는 상상 밖의 결론이 났다.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작년의 성과로 받는 금액인데 굳이 과장의 코 묻은 돈을 이렇게까지 깎으면서 주고 나한테 욕먹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원래 남에게 박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같이 한 직원한테 이렇게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할 줄은 몰랐다.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번 달 월급에 포함해서 주겠다고 하니 50%의 금액에 세금까지 또 왕창 떼이고 나면 얼마가 들어올지 모르겠다.


현금으로 결판을 볼 거면 나는 항공권 티켓 금액의 80%를 부르려고 했다. 황당하고 분했지만 엄마가 요즘 같은 시국에 무급휴직도 많은데 이것만 해도 어디냐? 감사하게 생각하고 화내지 말아라!라는 말에 나도 마음을 달랬다.


작년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힘든 해였다.

내가 맡은 일과 나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지금보다 월급을 적게 받더라도 이직을 할 생각까지 했었다. 올해 2분기에는 다른 회사에서 주재원 제안이 와서 드디어 이 회사에서 탈출해서 외국에 나가서 살면서 외국 사람하고 결혼도 할 수 있으려나?라는 섣부른 기대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역병으로 무산이 됐다.


좋게 생각하면,

작년의 그 힘듦을 버텨서 어찌 되었건 올해 기대했던 금액의 50%라도 받게 되었다. 만약 외국에서 근무를 했더라도 지금 상황에 굉장히 안 좋게 한국으로 되돌아왔을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지금 회사 상황이 나쁜 건 아니니 당장 월급에 큰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올해 1월에 필리핀을 다녀오고 나서 이렇게 비행기 타고 나가는 게 어렵게 될 줄이야 누군들 상상을 했을까?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만큼 조금 더 겸손하고, 주어진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작은 것도 감사하기로 했다. 엄마는 50%로 줄어든 금액으로 시그니엘에 가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그냥 저금을 하라고 하셨다. 누구보다 엄마가 기대를 많이 하셨을 텐데 아쉽다. 남이 정돈해준 좋은 침대와 방에서 남이 차려놓은 음식으로 아침을 드시고 싶으셨을 텐데 말이다.


천둥번개가 머리 위에서 요동치던 오늘, 나는 커피 한잔을 하며 인스타그램으로 동네 책방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제2차로 휩쓸고 있는 역병 탓에 8월 동안 문을 닫는다고 한다. 사장님이 평소에 안구 건조가 있는데 1) 책방 문을 열자마자 긴 장마가 오질 않나 2) 장마가 끝났다 싶었는데 코로나 테러가 와서 책방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눈에 자꾸 습기가 찬다고 한다. 책방 문을 닫고 혼자 책방 안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면서 책을 읽고 있다는 글을 읽고 마음이 짠했다.


사장님도 본인만의 긍정의 힘으로 마음을 잘 달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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