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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Sep 27. 2020

우리 동네 여행기

주 5일 중 하루는 집에서 일해요

내 방은 copito가 포도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나와 사이즈가 딱 맞다.


넉넉하지 않은 공간이지만 내 방에는 나 말고 숨 쉬는 다른 생명체가 있다.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한 기다란 열대식물과 높이가 1m인 만세 선인장, 귤이 두 개 달린 귤나무 그리고 작은 화분 7개가 곳곳에 있다. 이 공간에 싱글 사이즈 침대와 책상 그리고 큰 책장이 'ㄱ'자 모양으로 들어가 있고 붙박이 옷장도 있다.


재작년에 아파트 입주를 두 달 앞두고 새집 청소까지 끝났을 때 나는 부모님과 함께 이 집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큰방을 나에게 주자는 엄마의 말씀에 아빠는 내가 결혼하면 이 집에서 나갈 건데 뭐하러 안방을 주냐며 크게 반대를 하셨다. 그래서 나는 제일 끝방이자 크기가 가장 작은 공간에서 지내게 됐다. 정식으로 이사하기 전에 나는 주말 동안에 포장 이사하기 곤란한 내 물건들을 직접 옮기고 정리했다. 그런데 문득 내 방문을 열면 현관문이 바로 보이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강도가 칼을 들고 우리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죽는 사람이 나겠구나


중학교 때까지 나는 내 방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오랜 기간 한 방을 썼다. 그러다 보니 어린 나이에 베갯머리송사도 참 많이 들었다.


세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작은 공간이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내 방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는 나만의 공간이 매우 소중하다. 오전 재택근무를 할 때는 9시부터 11시까지 책상 아래로 햇빛이 쫙 들어온다. 그럴 때면 나는 슬리퍼를 벗고 맨발을 스트레칭하듯이 쭉 편다. 발이 따뜻한 느낌이 좋아서 메일을 쓰면서도 햇빛 쪽으로 발을 최대한 뻗어 보기도 한다. 낮에는 망상애자도 길거리에 없고 술 취해서 노래 부르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배달 오토바이 소음도 많이 줄어든다. 그 와중에 나는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 소음도 하나 찾았다. 그건 바로 옥수수를 찌는 소리다.


2주 전부터 오전에 '치지직'하는 소리에 창 밖을 내다보니 1톤 트럭에 옥수수를 파는 아저씨가 매일 아침 그 자리에 계셨다. 어렸을 때 엄마가 길에서 음식을 사주는 건 아주 드문 일이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도 길에서 음식을 안 사 먹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수시로 옥수수를 찌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다들 옥수수를 잘 사 먹는 것 같았다.


평일에 집에 있는 시간이 생기다 보니 아파트 단지를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아파트 정문 바로 건너편에 예쁘고 비싼 화분을 파는 꽃집과 밀크티와 마카롱을 파는 작은 빵집이 있다. 재택근무 때 거래처 직원이 나와 잠깐 만날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정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빵집에 들어가서 밀크티를 마셨다.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불량식품 색깔의 알록달록한 수십 개의 마카롱이 맛있어 보였다. 언제 말차 마카롱은 꼭 먹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쿠폰도 받았다.


아파트에서는 드디어 외부인 및 배달 오토바이의 통행을 막기 위해 (지상에는 차와 오토바이가 다닐 수 없는 아파트이다) 아파트 전체를 둘러싼 담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3일 전부터 정문을 제외하고는 후문과 쪽문을 오고 갈 때 입주민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만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내 방 창문 바로 아래로 보이는 공간에 철문을 설치할 때 그 소음이 어마어마했다. 화상회의를 할 때는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쪽문을 설치하고 나니 밤에 배달 오토바이가 들어오지 못했고 소주병을 들고 화단으로 넘어 들어오는 외부인들도 없어서 나는 드디어 고요한 밤 시간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이제는 아침 6시부터 창 밖이 시끄러워졌다.

이웃 아파트 주민들은 우리 아파트에서 자체 담을 설치한 것에 대한 분노가 굉장히 큰 것 같다. 지하철 두 노선을 사이에 둔 우리 아파트에서 출근길에 몇몇 분들이 평소대로 이웃 아파트를 가로질러서 가려고 했나 보다. 이웃 아파트의 주민 몇 분들이 아파트 내부 진입을 몸으로 막고 심지어 아파트 주변 도로도 걸어 다니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다툼이 생기는 거라고 들었다.


오전 8시 30분 화상회의를 하기 직전까지 창 밖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며칠 동안 지켜보며 남북 관계가 이런 걸까 싶기도 했다. 이웃 아파트 후문에는 관리인 네 분이 새벽부터 나와서 주민들 몇 분과 함께 길을 막고 서 계셨다. 가끔은 새벽 6시부터 옷을 껴 입고 본인들 아파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지키고 서 있는 이웃 주민들을 창 밖에서 쳐다보고 있노라면 이런 분들께 민생치안을 맡겨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까지 든다.


나를 둘러싼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다. 10년 전만 해도 이 곳이 논밭이었다고 들었다. 과연 이 곳과 주변 환경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기대가 되는 바이다.

지척으로는 이미 재개발로 오래된 건물들이 거의 헐렸다. 몇 년 뒤면 그곳에 우리 아파트와 동일한 브랜드의 아파트 몇 천 세대가 또 들어설 거라고 한다. 재개발되기 전 언덕 위의 집들을 구경하러 올라가 본 적이 몇 번 있다. 햇빛도 잘 안 들어오게 다닥다닥 붙어 있던 언덕 위 단독주택과 상점 그리고 일반음식점 팻말이 붙어있던 작은 술집들도 이제는 볼 수 없었다.


포클레인으로 큰 건물을 부시며 옆에서 물을 뿌려대는 광경을 신호를 기다리며 지켜본 적이 있다. 아까운 단독주택들도 많았지만 오래된 몇몇 건물은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지나친 재개발과 문명화로 또 다른 성북동 비둘기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이미 이동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조만간 우리 동네도 경기도 하남시처럼 도로가 정돈되고 근처 대학생들의 문화와 편의 시설이 좀 더 풍부해질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가 올 거라는 좋은 생각만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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