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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Sep 22. 2020

가을을 핑계 삼아 안부를 전하오

다들 뭐하고 지낼까?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앞서 가는 사람이 담배를 끄지 않아서 그 연기를 내가 고스란히 다 마셔야 할 때,

250도로 30분간 과하게 구운 오래된 밤고구마를 씹어 먹는데 지금 삼키면 딸꾹질이 날 것 같은 상황임이 분명한데도 뱉지도 못할 때,


어느 조직에 속해서 일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정신줄 놓지 않고 이런 식으로 버텨야 할 때가 참 많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곤욕스러운 일이 남의 돈 받아먹는 거니까, 그 힘든 일을 나는 오랜 시간 버티며 해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왠지 그런 날이 있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는 게 왠지 모르게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런 날은 드물긴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잠을 설친다. 피곤한 몸으로 회사로 이동하면서도 '별일 없을 거야, 나답게 잘 끝내야지, 생각했던 것만큼 큰일은 아닐 거야'라고 자기 암시를 한다. 하지만 그런 날은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에 낮잠도 못 잔다.


안타깝게도 그런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은 좀 많이 참아야 하는 날이었다.

시간제라도 좋으니 여기서 잘리지 않게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직원이 있다. 그  직원은 내가  하루 자리를 비운 사이 내 책상 위에 있던 택배를 허락 없이 뜯어서 안의 내용물을 먹어버리고 나머지는 어린이집 다니는 두 아이들에게 갖다 줬다. 과거에도 비슷한 사건을 벌였던 그 직원은 '택배 주인이 나인 줄 몰랐다. 뜯은 것은 본인인데 자기가 나눠줘서 먹은 사람은 막내 S도 있다'라는 핑계를 내세우며 밑도 끝도 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직원이 착용한 뿔테 안경 안으로 보이는 초점 없는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양옆으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면전에서 보고 있는 것이 나에겐 택배를 뺏긴 것보다 더 큰 곤욕이었다.


택배 사건이 잊히기도 전에 나보다 월급을 200만 원은 더 많이 받는 이사님이 메일로 본인의 업무를 나에게 떠넘겼다.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카톡으로 말을 할까 하다가 최소한의 예의로 마스크를 쓰고 이사님 앞으로 갔다. 황금 같은 오전 시간이라서  짧게 얘기를 끝내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마스크도 안 쓰고 계시던 이사님은 말수가 없는 내가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하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가 있는 분이셨다. 그 이사님의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 일을 할 줄 모르니 일을 할 줄 아는 내가 계속 그 일을 해달라'는 거였다.


직급이 한참 낮은 직원한테 업무를 모르니 해달라는 말을 부끄러움 없이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또 밤고구마가 목에 걸린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말 할 시간에 일을 했으면 진작에 끝냈을 일을 나는 나보다 15살이나 많은 사람과 서로 같은 말을 다른 식으로 얘기하며 서로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결국 유치원생의 손에 들려있는 색연필을 같이 부여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선을 그려주는 방식으로 업무를 차근차근 알려 드리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모든 직원들의 실수가 전부 나에게 쏠린 날이었다. 사소한 오타부터 시작해서 큰 내용까지 수정해 올 것을 당부한 나에게 본인이 어느 부분을 틀린 것인지 못 찾겠다며 그 서류 그대로 가지고 와서 찾아달라고 하던 세 명의 직원이 있었다. 시간 관계상 나는 형광펜으로 그어가며  족집게 과외처럼 단어를 콕콕 찍어서 알려줘야만 했다. 그나마 K 대리의 빠릿빠릿함과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에 쓸모 있는 인간이 사무실에 있긴 하다는 위안이 좀 되긴 했다.


유난히 배가 일찍 고팠던 오늘이었다. 점심시간에 나는 회사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한 중국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M과 같이 가서 먹고 싶었지만 M은 부사장님한테 발목이 잡혀서 나올 수가 없었다. 주인과 요리사까지 전부 중국인이던 한 중국집에서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게 올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팝송은 고등학교 때 정년퇴직을 1년 앞둔 할아버지 영어 선생님이 가끔씩 들려주던 팝송이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솔솔 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나는 뜬금없이 옛 생각이 났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의 나는 지금 이렇게 사는 내 모습을 상상이나 했던가?


중국집 바로 옆에 있던 카페에서 주문한 아이스 라테 한잔을 마시며 공원을 평소보다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 아닌데, 오늘은 날씨에 위로를 참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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