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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Oct 13. 2020

리틀 포레스트는 영화로만 봐야지

3시간 동안 밭에서 일하고 귀농의 생각을 접다

H에 살던 9살 때 아빠는 나랑 둘이서만 딸기 따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딸기? 아빠가 딸기가 있어요?

응. 아빠 밭에 딸기가 있어. 거기서 네가 딴 만큼 실컷 먹어도 돼


장날에 엄마는 딸기를 거의 안 사주셨다. 빨간 바구니 위에 보이는 큼지막한 딸기 밑에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딸기들이 숨어 있다고 하셨다. 엄마는 이렇게 파는 사람들 전부 사기꾼이라고 하셨다. 게다가 H의 지역 특성인지는 몰라도 엄마가 물건을 사기 전에 가격을 물으면 시장 할머니들은 대답도 하지 않고 봉지를 부리나케 꺼내서 물건을 담고 엄마한테 내밀었다. 당황한 엄마가 가격을 재차 묻고 빈손으로 돌아 나오면 그들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뒤통수에다가 욕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엄마는 야채, 생선, 정육점, 액세서리 (내 머리끈), 뻥튀기 과자집 (가실 때마다 뻥튀기 아저씨의 이목구비를 칭찬하셨다) 심지어 빵집까지 각각의 단골집이 있었다. 단골집이 문을 닫았더라도 엄마는 다른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경상도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엄마한테는 너무도 낯설고 적응이 되지 않던 H 장날의 모습이었다.


5일장이 열리는 봄날에는 딸기의 향이 사방에 진동했다. 하지만 유난히 호객행위도 과감했던 시장에서 가끔 엄마는 나보고 장사꾼들에게 눈길도 주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진한 딸기의 향만 맡으며 엄마 손을 잡고 앞만 보고 걸었다. 하지만, 편식이 심했던 오빠가 딸기를 먹겠다고 하면 엄마는 그 날만큼은 딸기를 이천 원어치 정도 사셨다. 그러면 나도 집에 와서 하얀 설탕을 딸기 위에 솔솔 뿌려서 몇 개 집어먹을 수 있었다.


나는 아빠가 밭이 있다는 것보다 내가 먹고 싶은 딸기를 내가 직접 따서 먹을 수 있다는 게 신났다. 나는 내 애정 인형 하나를 품에 안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우리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이동수단은 폐차 직전의 버스 아니면 오토바이였다. 그 당시 읍내에 나가려면 1시간에 2대 있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가끔 버스 아저씨가 그냥 지나치거나 1시간에 버스 1대만 와서 읍내에 못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쉬는 날에는 아빠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에 나간 적이 가끔 있다. 헬맷을 쓰는 건 아빠 혼자였다. 그리고 내 자리는 오토바이 사물함 위였다. 아빠 앞에 앉아서 헬맷도 쓰지 않아도 아빠가 나를 안듯이 핸들을 잡고 있고 내 품에는 애정 인형도 있어서 무섭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먼 길을 갈 때면 아빠 팔에 내 얼굴을 묻고 깊은 잠이 든 적도 많다. 그 와중에 내 애정 인형을 떨어뜨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던 H에서 나는 많은 운을 이미 사용했던 것 같다. 오토바이 사고도 한 번 났었고 자동차와 큰 사고가 날 뻔한 적은 수없이 많았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 담임 선생님께서 오토바이가 엄청 위험하니 절대 타고 다니지 말라고 몇 번을 말씀하셨다.


아빠는 엄마한테 가서 딸기 담을 봉지를 받아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그 땅에 간다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빠가 관사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진 어느 숲 속에 있는 땅을 사는 것보다는 관사 바로 길 건너편의 평지에 땅을 사는 게 어떻겠냐고 여러 번 의견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단독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아빠는 '당신이 뭘 안다고, 뭣도 모르면서 왜 관사 건너편의 땅을 사라고 하냐'라고 비웃었다. 그 후로도 엄마는 몇 차례나 아빠한테 숲 속에 있는 땅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모든 관리는 아빠 선에서 이루어졌다. 아빠는 결국 고집대로 본인이 봐 둔 땅을 구입하셨고, 언제 어떻게 그 땅을 사게 됐는지는 엄마는 지금도 잘 모르신다.


나는 아빠 앞에 걸터앉아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렸다. 불행하게도 우리를 앞서서 달리는 트럭 한 대 때문에 헬맷이 없던 나만 눈에 모래가 잔뜩 들어갔다. 눈을 비비자 아빠는 눈이 나빠진다며 꾹 참고 울라고 하셨다. 나는 딸기밭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참고 찡그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어느 숲 속에서 아빠는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말씀하시며 오토바이를 세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군부대가 보였고 학교 다닐 때 소풍으로 한 두 번 갔었던 산도 보였다. 아빠는 그 땅으로 크게 돈을 벌거라는 희망에 부풀어서 신이 나서 나에게 뭐라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주인이 원래 없을 것 같던 숲 속의 작은 밭은 어린 내가 봐도 돈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막상 딸기를 따려고 보니 시장에서 파는 딸기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크기는 훨씬 작고 빨간 부분은 아랫부분에만 몰려있고 중간 이상은 녹색과 흰색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집에 가져갈 것까지 최대한 익은 딸기를 작은 봉지에 가득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빠 따라서 그 땅에 다시 간 일은 없었다.


몇 년 뒤 I로 이사를 와서도 우리는 H의 소식을 종종 들었다. 발령 시즌이 되면 관사에서 이웃이었던 분들과 서로 전화를 하며 안부를 물었고 오빠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우리는 관사 바로 길 건너편이 재개발로 엄청나게 가격이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땅에서 농사를 크게 짓던 오빠 친구의 부모는 한순간에 현금 부자가 됐고 벤츠 트렁크에 농기구를 싣고 다니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H에서 가장 공부를 잘해서 과학고를 거쳐서 S대 의대까지 간 친구보다 더 유명해진 오빠 친구는 초등학교 때부터 워낙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갔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있고 H에서 가장 많은 여자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아직까지 전해 듣고 있다.


전직 D 회사 영양사였던 엄마가 이왕 땅을 살 거면 관사 길 건너편에 사자고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1. 큰 길가이고 평지라서 개발 가능성이 H에서 그나마 있는 곳이다

2. 우리가 자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건물이든 땅이든 사야 한다. 꼭 돈 못 버는 것들이 멀리 뭔가를 사서 쉽게 오고 가지도 못하더라


아빠가 사뒀던 숲 속의 그 땅 주변도 20년 만에 개발은 됐다. 숲이라고 생각했던 곳들이 경작이 돼서 마을도 들어서고 아빠 땅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신도시도 생겼다. 땅을 관리하기 위해서 2~3년에 한두 번씩 부모님은 H에 다녀오셨다. 몇 년 전에 나는 휴가를 내고 H에 가서 아빠 땅을 보고 현재 경작해주시는 분을 만났다. 매 달 아빠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은 "없어도 될 정도의" 금액이지만 어찌 되었건 전문가의 손에 관리가 되고 있었다.


남이 경작하기 전에는 내가 직접 밭에 가서 씨앗도 심고 대나무도 뽑았던 경험이 있다. 회사 생활만 하지 않으면 목이나 어깨 통증이 없을 거라던 필라테스 원장님의 말은 거짓이었다. 고작 3시간 쭈그려 앉아서  맨손으로 호미를 들고 밭을 일궈보니 목 어깨뿐만이 아니라 허리와 골반까지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내가 하루 휴가를 내서 힘들게 씨앗을 뿌렸던 곳은 얼마 뒤에 새가 와서 다 쪼아 먹었고, 뿌리까지 뽑았다고 생각했던 대나무는 다시 빠른 속도로 성장해서 대나무 밭을 만들어 버다.


내가 좋아하는 김태리 배우가 주연한 리틀 포레스트의 영화를 보면 취업에 실패해서 고향으로 내려온 후의 사계절 동안의 삶을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묘사해 놨다. 하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니까, 목과 어깨가 결리는 사무직일지라도 나는 서울에서의 삶을 계속해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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