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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Nov 21. 2020

코로나 시대의 미술관 방문 이야기

김환기 작품보다 환기 미술관 건물이 더 멋지다

나는 가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수집한다.

오래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내가 한 때 가장 좋아했던 빅뱅 탑이 김환기나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들을 사들여서 집에 둔다고 들었다. 탑이 수집한다는 김환기의 작품을 보러 20대 초반에 이태원에 있는 리움 미술관에 갔다. 그 때 김환기의 작품을 처음 봤다. 엄청나게 큰 캔버스 안에 푸른빛의 점이 원을 그리며 뒤덮고 있었다.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고, 왜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나 같은 사람은 감히 살 수도 없는 고가인지 궁금했다. '혹시 삼성가에서 여러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니까 가격이 오른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도 들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김환기의 작품에 큰 매력을 느끼진 않는다.

내가 가끔씩 수집하는 작품은 그냥 단순하게 내가 보고 '아! 참 좋다' 라고 느끼는 작품이다. 아무리 고가라도 내가 보고 별 감흥이 없으면 수집해봤자 작은 평수의 집에 걸림돌일 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들어도 할부로는 사지 못한다. (체크카드만 두 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사 온 그림은 내가 직접 들고 들어오기 때문에 부피가 작다. 한국에서 산 그림은 중국과 일본에서 그려진 그림이나, 도자기로 구워진 풍경화 그리고 자수가 들어간 액자 정도이다. 외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그림 중 몇 개는 관사에 살 때 비가 새서 아까운 작가의 작품 두 개는 버리고 나머지 한 개는 현재 거실에 잘 걸려 있다. 생각해보니 외할아버지 취향도 김환기 쪽은 아니었던 듯하다.


언제 코로나에 걸릴지 모르는 이 상황에 나는 오늘 하루도 후회 없이,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을 보러 밖에 나갔다. 오늘은 서울에 살면서 미루고 미루어왔던 '환기 미술관'에 갔다. 김환기의 작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보는 것은 좋아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가치관도 계속 변하기 때문에 과거에 별로였다고 생각하는 작품도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가서 보는 편이다.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없고 날이 따뜻해서 오늘은 좀 걷기로 했다. 컴컴한 지하에서 지하철을 환승하려고 걷는 게 싫어서 시청역에서 내렸다. 시청역에서 나오면 덕수궁 근처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중국집이 하나 있다. 친한 사람들하고 같이 이 중국집에 가면 다들 이런 곳에 이 정도 맛을 내는 중국집이 있었냐고 놀란다. 나만 알고 싶은 음식점이니까 중국집 이름은 적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짜장면 중에 가장 맛있게 먹은 곳이다. 우동, 우육면, 고추짜장 그리고 유린기도 다 맛있다


환기미술관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밥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일정 시작 전에 밥을 챙겨 먹길 정말 잘했다. 시청역에서 환기미술관까지 걸어오니까 8,069보가 찍혀 있었다.


이번 달부터 새로 개방한 북악산 1번 출입문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환기 미술관이 나온다. 다음 주에는 북악산 개방한 곳도 가봐야지


환기 미술관 내의 김환기 작품은 사진 촬영 금지라서 작품 사진은 없다. 김환기 사진과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며 인연이 있는 나희균의 작품만 사진을 찍었다.


멀대같이 히멀건하게 구부러진 남자와 아이같이 해맑은 표정의 작은 여인이 매달려서 활발하게 걷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고 행복해 보이네


환기 미술관의 건물은 참 독특하다.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했는데 나에겐 사실 미술작품보다 건물을 보는 재미가 더 있었다. 넓어졌다가 좁아지는 계단, 그리고 2층과 3층의 다른 높낮이에 건물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또한, 자연채광을 잘 살려서 작품을 은은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오르고 내리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 위 그림들은 나희균의 작품들이다
고요함의 추상성을 그림으로 표현한 창의력이 대단하신 듯하다. 노을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연못에 지는 해가 비치는 것 같기도 하네
김환기와 나희균이 1957년 파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 당시 외할아버지가 일본에만 가셔도 김포공항에 온 가족이 모여서 손 흔들었다고 들었는데 파리까지 갈 정도라니......
김환기가 여기서 사진을 찍고 60년 뒤에 나도 이 곳 베즐레 성당을 방문하게 됐다


... 그래 좋은 예술도 많이 보았겠고,
늘 보고 있을 테니 희균이도 좋은 그림, 많이 그렸겠지?
그래, 그림은 잘되나? 초조해말고 재주 부리려 말고,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일을 해요.

희균이한테는 좋은 것이 있어.
성격은 참한 것 같은데 그림은 거칠거든.
내가 잘못본지는 몰라도 그런 것 같아.
이 거칠다는 의미는 나쁘다는 말이 아니야.
아마, 거기 가서, 생각하는 것, 또 그림, 몰라보게 달라졌을 줄 알아요.
달라진 것 대단히 좋지만, 자기라는 본질은 달라질 수 없으니
그걸 잘 생각해서
천 가지 만 가지의 파리에서의 형태에 현혹되지 말아요.
본래대로 잘 정리하란 말이지요...

1955년 7월, 김환기 편지 중에서


자연채광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이 미술관 건물에 홀딱 반했다. 이 건물 얼마면 됩니까?
김향안 여사가 프랑스 유리공방에 의뢰해서 antigue glass 기법으로 제작한 채색 유리다
계단 폭이 매우 좁아서 한 사람만 오르내릴 수 있는 곳이었다. 창문 대신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으니 내려오는 동안 황홀한 느낌이 들었다
2층에서 내려다본 1층의 작품들. 건물 구조가 매우 독특하다


미리내

밤하늘을 우러러보니 나의 미소함과 우주의 광대함에 숙연해집니다.
더구나 아름답게 빛나는 성운들과 미리내는 신비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의 죄악을 뛰어넘는 저 하늘의 별무리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회심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15, 나희균


정말 개인은 광활한 우주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건데 너무도 많은 욕심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와중에 오른쪽 작품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내 방에도 블라인드 말고 이런 천으로 커튼을 만들어볼 걸 그랬나? 은은한 채광이 멋지다
누군가에게는 화장실 타일 조각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소금이 꽃피는 염전의 모습이다
환기 미술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외부 계단의 모습과 이 그림이 닮았다. 왼쪽의 수많은 네모와 작품 속의 네모들......
미술관 밖에도 작품이 있었다. 다소 방치된 듯 보였던 작품이라서 나 외에는 아무도 보러 안 오더라
미술관 밖의 부암동 모습이다. 이 동네도 참 예쁘다. 두 길 사이에 우두커니 지어진 집에는 과거와 현재 모습이 섞여 있었다
수향산방 안에 김환기 작품이 있다. 사진 촬영 금지라서 사진은 하나도 못 찍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환기 미술관을 방문했다.

환기 미술관에서 나와서 부암동을 크게 한바퀴 돌아보니 개성있는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유명한 카페에 들어가서 원두를 몇 가지 사고, 정말 작은 빵집에 들러서 크렌베리 바게뜨도 하나 샀다. 내 품 안에서 맛있는 냄새와 고소한 원두향이 솔솔 풍기니 '오늘이 평화로운 토요일 맞구나' 싶었다. 정말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환기 미술관도 오늘로서 가 봤으니 조만간 문재인 대통령이 발도장을 찍고 온 북악산 새로 개방된 코스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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