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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Dec 03. 2020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 처음 남자를 때릴 뻔한 이야기

지금의 나는 회사에서 조직의 허리 부분에 위치해 있다고 해야 하나?

브런치에 올라온 대부분의 글을 보면 조직의 허리에 오기도 전에 사람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허리에 있는 사람도 신입이나 3년 차의 과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경우가 종종 있다. 단지 그들은 밑에 직원들의 고충에 대해 어디 가서 말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내뱉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간관리자들이나 더 윗선에서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참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얼마 전에 탕비실에서 티백 하나 꺼내는데도 온갖 차와 커피를 뒤집어놓는다는 직원 얘기를 브런치에 적은 기억이 난다. 그 직원은 3개월 전에 퇴사를 했고 그 직원 대타로 갓 의경에서 제대한 (의경도 제대했다고 쓰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Y보다 한 살 많은 친구가 입사했다. 의경은 광화문에서 집회 시위만 막는 줄 알았는데 그 친구는 서울의 **경찰서 취사병으로 근무를 했다. 아직 군기가 바짝 든 친구라서 말끝마다 "~습니다"로 깔끔하게 대답하는 H군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점심 식사 메뉴를 주 5일 동안 겹치지 않게 잘 고르고, 나 다음으로 우리 탕비실의 핸드타월을 잘 채우는 점이 좋다. 본인 자리에서 혼잣말을 잘해서 가끔은 '누구한테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싶은 의문이 들곤 한다. 하지만 H와 내 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다지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반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고 신경 쓰였던 한 신입사원이 있다. 그건 바로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K다.

K는 출근시간마다 나를 졸졸 따라온다. 내 걸음이 상당히 빠른데 K를 따돌리느라고 평소보다 더 속보로 걷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는 나와 나란히 걸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같이 걷다 보면 K의 상체가 하체보다 더 앞으로 나와 있는 게 보인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K도 말이 없다. 이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K는 항상 출근 때 나를 따라온다. 꼭 어렸을 적에 즐겨 보던 만화 영심이에 나오는 경태의 모습이다.


3개월 전부터 우리 탕비실에 들쥐 한 마리가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탕비실 비품은 내가 미리 주문해서 채워놓고 정리한다. 코로나 때문에 6개월 이상을 밖에 나가지 않고 배달시켜서 먹다 보니 플라스틱 용기가 금새 쌓인다. 우리는 청소하시는 여사님들을 위해서 80L짜리 큰 봉지에 배달용기를 세척해서 그 안에 차곡차곡 넣어놓는다. 적지 않은 인원이다 보니 비닐과 같은 비품 그리고 커피나 아침을 거르고 오는 막내들을 위해 다과도 부족하지 않게 사둔다. 그런데 탕비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다과도 집에 챙겨가던 그 직원이 퇴사를 했는데도 가끔 '그 직원이 왔다 갔나?' 싶은 착각이 몇 개월 전부터 들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우리 부서에는 그런 민폐 직원이 없는데......

믹스커피가 유난히 빨리 사라지고 바닥이나 정수기 위에 뜯지 않은 커피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가 하면 공유가 선전하는 커피는 박스 윗부분이 항상 화난 듯이 뜯겨 있었다. 카*는 상자 옆부분에 컵 모양을 점선 따라서 떼면 하나씩 쏙쏙 빼먹으면 된다. 그런데 왜 상자 윗부분이 자꾸 뜯겨 있는 건지 의아했다. 심지어 내가 미리 사다둔 비닐도 너무 빠른 속도로 없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근무 중에 벨이 울려서 H군이 문을 열었다. 순간 쏜살같이 K가 너무 익숙하게 우리 탕비실로 들어왔다. 한참 계약서를 보고 있던 나는 순간 귀를 기울였다. 탕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근무하고 있는 나였지만 탕비실 선반을 열면서 뭔가를 챙겨가는 소리는 고요한 사무실의 정적을 깨고도 남았다. 어디서 샀는지 얼룩무늬의 와인색 남방을 입은 K는 두 손 가득 뭔가를 쥔 채로 나가려다가 H에게 '커피 좀 빌려갈게요'라고 말하고는 도망치듯 나갔다. K가 들어왔다가 나간 탕비실의 모습은 언뜻 보면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였다. 정수기 위에 놓여있는 믹스커피나 카*도 아침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가 열고 간 선반을 열어보니 엊그제 새로 사다 둔 카* 상자 윗부분이 쥐가 파먹듯 마구 뜯기고 몇 주먹을 가지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상자를 들어보니 남아있는 양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럴 거면 통째로 들고 가는 편이 완전범죄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 사무실에서 자꾸 없어지던 비닐도 그쪽 부서에서 배달시키고 남은 플라스틱이나 쓰레기를 처리하려고 K가 말도 없이 가져갔던 거라고 청소하시는 여사님이 귀띔을 해주셨다.

여사님 : 내가 그 남자 직원한테 얘기했어. 그쪽 사무실에도 비닐 좀 구비해두라고!

Sorita : 아! 그랬더니 뭐래요?

여사님 : 알겠다고 하더니 안 사놓대? 그래서 몇 개월째 뭐라 하니까 얼마 전부터는 이쪽 사무실로 와서 한 묶음씩 들고 오던데 뭘...... 얼마 안 하니까 그냥 놔둬

Sorita : 그 직원이죠? 그.... (차마 대머리 남자냐고 얘길 못하고 내 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사님 : 웅! 맞아. 그 대머리 직원 허허허


아주 사소한 것들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얘기를 해야 했다. 


왜 남의 부서에 와서 자꾸 훔쳐가냐고. 너네는 부서 비용이 없냐,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인터넷으로 시켜서 비품 좀 사라! 그리고 왜 먹던 커피를 안 먹고 꼭 새 상자를 뜯어서 가져가냐?


이렇게 벼르고 벼르다 보니 오히려 출근 시간에 내가 K와 마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참다 참다가 아주 작은 일에 폭발해서 다 쏟아내버리면 '미친 여자'라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차근차근 얘기를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이렇게 벼르고 있는 것을 K는 절대 모를 텐데, 그 이후로 K를 출근 시간에 마주친 적이 없다. 그러다가 며칠 전 점심시간에 커피 한잔을 사들고 들어오는 길에 K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봤다.

나는 시력은 좋지만 난시가 있어서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K의 실루엣은 몽골의 어느 사막에서도 알아차릴 정도다. 그런데 그날따라 K의 고개가 20도 정도 오른쪽으로 꺾여있고 외투는 급하게 걸쳐 입었는지 달려있는 모자도 오른쪽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Sorita : 어디 가요?

K : 아 저 그게...... 병원에 갑니다

Sorita : 왜요?

K : 그때 접촉사고 난 후로 목이 좀 안 좋아요

Sorita : 아, 여기 길 건너에 정형외과 있어요

K : 아니요, 전 무조건 대학병원만 갑니다. 이번 건강검진도 저 혼자 아산병원 다녀왔어요


아파서 대학병원에 간다는 사람을 붙잡고 비품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치료 잘 받고 오라고 K를 그냥 보내줬다. 그러고 보니 고시 공부할 때도 7시간 이상 공부하면 몸 다 버린다고 했던 얘기도 떠올랐다.


한 때 직장인들 사이에서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어딜 가나 또라이 한 명씩은 있으니 또라이를 피할 수 없다는 거였다. 나 역시 탕비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던 직원이 퇴사를 하자 엄한 남의 부서에서 비품을 '빌려간다고 해놓고 한 번도 갚지 않은' 직원을 다시 만났다. 또라이는 상위 직급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하고자 하는 말의 절반도 안 하고 꾹 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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