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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Dec 12. 2020

우리 집에서 롯데타워는 보이지 않는다

호캉스도 불가능하게 된 현실

나는 외삼촌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자랐다.

병원에서 태어났을 때 삼촌은 오빠와 함께 나를 보러 왔다. 그때 삼촌은 대학생이었고 취업준비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가득했던 삼촌은 갓 태어난 나를 보고 동질감을 느꼈다고 했다.


3년 후 H로 이사를 오면서 삼촌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살게 됐다.

다행히 삼촌은 호텔경영학과로 유명한 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그 후 L호텔에 입사를 했다. 삼촌은 1년에 한 번씩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나를 보러 오셨다. L호텔 베이커리에서 파운드케이크를 종류별로 사 왔고, L백화점에서 학용품과 많은 인형도 사다 주셨다.


초등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나를 키워주고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에 대한 정답을 나는 너무나도 자신 있게 '외삼촌'이라고 적었다. 빨간색 색연필로 오답이라는 표시가 있는 시험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내가 그렇게 생각을 안 해도 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오면 답을 부모님이라고 써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1년에 두 번 있는 방학 때마다 서울에 올라가서 삼촌을 만났다.

지금은 역사적인 건물로 남겨지고 노숙인들의 쉼터가 되어 버린 서울역에서 삼촌은 퇴근 시간에 맞춰서 우리를 마중 나와있었다. 그때 당시 4호선 라인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던 삼촌은 내가 서울에 오면 꼭 하룻밤은 L호텔에서 숙박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L호텔에서 처음으로 침대에 누워봤고 관사에서는 절대 쓸 일이 없었던 욕조에서 거품 목욕도 해봤다. 그리고 뷔페에서 1년에 한 번 먹어볼까 말까 한 음식과 각종 디저트도 배 터지게 먹어볼 수 있었다. 다같이 식사를 하는 도중에 삼촌의 직장 동료분이 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갔고, 밥을 다 먹고 나갈 때면 그 동료분은 호텔 케이크를 내 손에 쥐어 주셨다.


H에서는 절대 누려보지 못할 삶을 서울에서 며칠이나마 짧게 경험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호박마차를 타고 어두컴컴한 다락방으로 돌아온 신데렐라처럼 그 공허함이 엄청났다. 10살도 안 되는 어린 나이에도 내 환경이 어떻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고 웬만한 감정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잠실에 있는 L호텔에서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의 엘리베이터를 보면 어렸을 적 호텔에 왔던 생각이 난다. 호텔방에서 내려다보던 놀이동산과 매번 갈 때마다 심한 정전기로 호텔방 문고리를 잡기 겁내 했던 그때 그 기억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어렸을 적엔 26살이었던 삼촌과 결혼할 거라고 얘기하고 다니던 나는 대학생이 되어 삼촌을 따라서 호텔에서 일을 해 볼까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L호텔뿐만이 아니라 S호텔까지 면접을 봤지만 해외 유학파들 속에서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취업은 고사하고 호텔에서의 인턴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어느 날, 삼촌이 계신 부서에 내가 태어난 곳에서 온 내 또래의 친구가 입사를 하자 삼촌은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삼촌은 그 친구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힘들게 입사를 했으니 잘 적응하길 바랐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했던 일이 아니라며 몇 달 뒤에 삼촌과 면담을 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삼촌은 신입사원이었던 그 친구와 마지막으로 밥을 먹으면서 꿈이나 목표가 어렸을 적 내가 삼촌한테 얘기하곤 했던 가치관과 너무 비슷해서 그 친구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한편 나는 아주 다른 업계로 취업을 했다. 회사 위치상 그 호텔을 자주 지나다니고 있다. 한 때 부실공사의 논란이 있었던 큰 호텔이 내 추억의 호텔 바로 옆에 또 들어섰고, 그 건물은 이제 그 지역을 뛰어넘어 서울의 상징이 됐다. 퇴근 후 석촌호수를 친구와 한 바퀴 돌다가 들어간 한 카페 바로 옆에는 L타워가 훤히 보였다. '언제 저 호텔 꼭 한번 가봐야 하는데...'라고 그 친구는 중얼댔다. 언제 한번 가보자고 약속했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 호텔에 가보지 못했다. 올해 초 인센티브로 가려고 했던 시그니엘은 상무님의 농간에 40%만 지급이 되어 무산이 됐다. 연말에라도 꼭 가보려고 했지만 코로나로 밖에서 숙박하기가 굉장히 찝찝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호텔의 꽃은 조식 뷔페인데 조식을 찜찜하게 먹을 순 없다. 결국 올해는 의도치 않게 해외여행 두 번의 경비와 호텔값을 절약하게 됐다.


부모님보다 더 큰 존재로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직전까지 도움을 주셨던 삼촌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젯밤 지금까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일을 하며 모았던 저금 내역들을 보니 과연 나라는 사람이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고 죽기 전까지 얼마만큼이나 돈을 더 벌까?라는 의문도 생겼다. 


지금은 삼촌이 아니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 호텔에 가서 숙박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년이 보장된 직업이 아니고 현재는 한 치 앞도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이기에 벌 수 있을 때 돈을 모아 놓자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코로나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삶이 불안정해졌다. 이럴 때일수록 믿을 건 내 몸뚱이 하나뿐이다. 내가 움직여야 지금처럼 월급을 받고, 내 삶이 안정적이어야 내가 보는 세상도 조금은 덜 불안할 수 있다. 이제는 내 돈을 내고 운동하는 것조차 자유로워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 꾸준히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자 한다. 이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름의 방법을 찾아서 잘 살아볼 생각만 하더라.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면서까지 헬스를 하다가 다시 필라테스로 돌아왔다.

나와 동갑인 선생님께 '될 때까지 연습하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며 몸을 단련하고 있다.


이번 주부터 서울 시내 어디든 불이 꺼지고 블라인드가 내려진 수많은 필라테스 학원을 보니 당장 먹고 살 문제를 다들 어떻게 해결할 생각들인지 남일 같지 않게 걱정이 된다.


과연 내년 1월엔 필라테스 기구 위에서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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