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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r 23. 2021

북악산 1번 출구 탐방기

이제 신분증 없어도 입장이 가능해졌다. 벌써 나도 옛날 사람이 된 건가.

Y에게 내 나와바리를 어쩌다 보니 뺏겼다.


친구들하고 종종 방문하거나 혼자 수시로 산책하던 내 나와바리에 Y가 일을 하고 있으니 마음 편히 갈 수가 없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도 해봤다. 가장 큰 이유는 만약 Y랑 마주치게 된다면 그 어쩌지 못하는 '뻘쭘함'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일을 하고 있으니 인사를 할 수도 없고 손조차 못 흔든다. 그렇다면 Y를 보고도 그냥 돌부처 옆을 지나치듯이 가야 하나? 그렇다고 중년 아저씨처럼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하고 지나갈 수도 없지 않은가? 원래 나라는 인간은 생각이 많은 편이 아닌데 그 길을 직진해서 통과하는 것에 있어서는 생각이 무지하게 많아졌다.


결국 그 길을 지나가는 대신 크게 우회해서 다니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랑 등산 약속을 잡았다.

그 친구도 서울 지리에 밝아서 그 날만큼은 15분이나 더 돌아서 가는 길을 택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적이 등산인만큼 친구의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껴줘야 했다.


그 날 Y가 근무 안 할 수도 있지! 그리고 설마 수많은 사람 중에 날 알아보겠어?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오랜만에 내 나와바리로 직진했다.


죄지은 것도 아니니까 당당하게 걸으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마스크를 눈 찌르기 직전까지 바짝 올리고 재킷 깃도 세웠다. 바람막이 재킷이라 모자도 있었지만 이걸 쓰면 더 튈 것 같았다. 친구를 바깥쪽에 세워서 최대한 한 몸이 되어 대화하는 척 담담하게 걷고 있는데 다행히 Y보다 훨씬 연배가 있으신 선배님들만 보였다. 걷다 보니 불안한 마음도 없어졌다. 안심하고 그제야 친구 말에 맞장구를 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소년병 같은 아이가 일을 하다가 내 쪽을 쳐다봤다. 순간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가 다시 그 아이를 쳐다봤을 때 그 친구는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Y였다. 항상 긴장된 자세로 일을 하고 있다는 그의 말과 달리 Y의 몸에는 여유가 넘치고 군살 없는 몸에 착 달라붙은 옷도 매우 잘 어울렸다.


상대방을 보지 않는 것 같아도 본인은 4초 안에 다 파악할 수 있다고 하더니 정말 그는 멀리 있던 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4초 안에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빨리 훑어보는 것을 배우지 않은 나도 어찌 되었던 Y를 찾았다. 순간 마스크 안에서 웃음이 터졌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진이라도 찍어주고 싶었다.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이번에는 사방에 막내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동료분들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눈인사만 하고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빠져나왔다.


친구랑 가기로 했던 등산코스는 얼마 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개방한 북악산 1번 출구였다.

1번 출구 초입에는 정말 멋있는 기와집이 있다. 앞 뒤로 살펴봤는데 100평은 될 것 같았다.


매번 지나갈 때마다 탐나는 집이다. 얼마면 살 수 있을까? 내 소유라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잘 보존할 자신 있는데......


북악산 1번 출구 바로 옆에는 커피는 정말 비싸고 빵은 맛있는 베이커리 카페도 있다.

그 전날 빵은 50% 세일하니 나같이 부지런한 사람들은 와서 먹고 가거나 사들고 갔다. 그 날 어쩌다 보니 양손에 빵을 잔뜩 들고 북악산에 오르게 됐다.


군사시설이라 지금까지 개방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소 투박한 모습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다듬지 않은 이런 모습을 매우 좋아한다.



기관총 쏘던 곳일까? 곳곳에 흥미로운 장소가 많았다. 말끔하게 길 만든다고 애써 치우지 말고 그대로 보존했으면 좋겠다
이곳에 몇 명의 군인들이 왔다 갔을까? 다들 많은 생각들을 하며 여기서 시간을 보냈겠지?


뜬금없이 수풀 속에 길쭉한 탑이 보였다. 줌인을 한참 해서 찍은 것인데 용을 써도 절대 갈 수 없는 길이라서 멀리서만 봤다. 무슨 탑일까? 혹시 아는 사람 댓글로 정보 주세요!
통행로가 아닌 곳에 돌계단이 있고 비석 두 개가 있었다. 예전에 절터였나? 없던 호기심도 마구마구 생기던 북악산 1번길이었다


북악산 1번 길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30분이면 끝나니 이왕 온 김에 북악산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예전엔 신분증을 제출하고 개인정보를 모두 적은 후에 입장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목걸이만 착용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북악산에 오니 지금까지 같이 왔던 사람들도 생각이 나고, 상무님한테 혼나고 홧김에 주말에 이곳에 왔던 기억도 났다.


이런 추억도 잠시, 촛대바위에서 숙정문으로 내려오는 길에 한 커플이 내 뒤를 신경 쓰일 정도로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이 시간에 나에게 허용된 소음은 가끔씩 지저귀는 새소리뿐이었는데 여자의 짜증 섞인 하이톤의 목소리가 자연의 소리를 묻어버렸다. 의도치 않게 그녀의 하소연을 그 여자와 동반한 남자와 묵묵히 들으며 15분 이상을 함께 내려와야 했다. 흥미롭게도 그 사람은 요즘 이슈가 되는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다.


학폭 가해자녀 : 아 C, 내가 그때 일 미안하다고 했는데도 사과를 안 받아주잖아

남자 : 아 진짜?

학폭 가해자녀: 그때 그 일 가지고 뭘 그러는지 모르겠어.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한다'라고 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해. 친언니까지 관련이 되어 있어서 빨리 이 일을 끝내야 하거든

남자 : 큰일이네......

학폭 가해자녀 : 이번 주 내내 신경 쓰이고 짜증 나서 일 하나도 못했어. 여차하면 변호사까지 선임해야 할 판이라니까


뉴스에서 보던 학폭 가해자라니 순간 얼굴이 궁금했다. 그리고 이 불필요한 소음을 더 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내려오는 길은 하나였다. 오른쪽은 성곽이라 뛰어내릴 수도 없고 왼쪽은 군사지역이라서 자칫 들어갔다가는 경고음이 울렸다. 5분을 더 걸어내려가니 마침 왼쪽에 의경이 서 있고 벤치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쉬는 척 커플의 얼굴을 봤다. 말끔하게 등산복으로 차려입은 여자는 지나간 학교 폭력사건을 큰 손짓으로 얘기하며 옆의 남자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여자의 학폭 사건을 알게 된 이 마당에 미래를 약속할 수 있을까? 만약 현명한 사람이라면 친구든 이성관계든 말끔하게 정리했기를 바란다. '제 버릇 개 못준다'라는 옛 속담의 말처럼 한번 때리기 시작한 여자가 남자한테 손찌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자꾸 옛 속담이나 어른들의 말에 공감을 하게 되는 걸 보니 정말 나도 이제 옛날 사람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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