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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r 21. 2021

Latte의 영어 교육은 이랬는데

Sorita와 Sophia의 영어 공부 이야기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뜨끈뜨끈해진 눈을 감고 있는데 오빠한테서 카톡이 왔다.


오빠 : ** 영어 학원에서 메시지를 이렇게 보냈는데 뭐라 답하면 되니?

Sorita : '잘 알겠다. 고맙다'라고 보내면 되겠네 뭐...... 오늘이 첫 수업이었나봐? 와! 내 조카가 벌써 영어도 배우는구나!

오빠 : 어, 근데 학부모들한테도 영어로 메시지가 오네. '고맙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라고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쓰면 되니? 


오빠는 7세의 하나뿐인 딸이 영어 학원에서 수줍어하지 않고 씩씩하게 말을 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빠가 본인의 딸 교육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것을 보니 신기했다. 어렸을 때 본인 공부에도 그 정도로 열심이었다면 엄마가 속상할 일이 덜했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7세 때부터 영어를 배웠다.


어느 날 엄마는 오후 5시가 되면 오빠랑 같이 작은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작은방 안에는 밥상 두 개가 나란하지 않게 놓여있었다. 높이가 살짝 더 높은 책상은 오빠 것이었고 그 책상은 항상 내 것보다 20cm 정도 앞에 높여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절대 오빠 책상과 내 책상을 나란하게 두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몇 분 뒤 그 당시 H에서 보기 드물게 세련되고 환한 미소를 띤 20대 여자가 "Hi"라고 외치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도시에서 살던 이모가 두 자녀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것을 보고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는 당시 유행하던 Yoon선생님의 도움으로 우리에게도 영어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 월급 40만 원으로는 오빠와 나 두 명의 영어교육비용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엄마는 오빠가 영어를 배울 동안 나는 20cm 떨어진 밥상에 앉아서 어깨너머로라도 영어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오빠는 수줍음이 너무 많았다.

오빠는 유치원에서 노래 부르고 율동하는 게 부끄러워서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 적이 많았다. 그랬던 오빠가 처음 보는 여자 선생님 앞에서 큰소리로 영어 단어를 읽고 영어로 노래까지 불러야 하는 것은 큰 곤욕이었을 것이다. 굳이 방에 들어와서 선생님께 드릴 과일을 깎으시던 엄마도 오빠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에 조바심이 났고, 교재를 빨리 끝내고 다음 교재를 엄마에게 팔아야 했던 선생님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중간에서 이런 답답한 상황을 참고 있어야 하는 나도 황당했다. 왜냐하면 오후 6시면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시간탐험대'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어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배꼽인사를 하자마자 나는 안방에 뛰어들어가서 텔레비전을 켰다. 오빠 때문에 수업이 늦게 끝나서 그 날의 에피소드 제목도 못 보고 샤랄라 공주가 이미 오마르 왕자의 품 안에 안전하게 있을 때 나는 억울하고 분했다. 밖에서 맞고 들어와도 잘 울지 않던 나는 그때만큼은 악을 쓰고 울었다.


그 후로 나는 오빠가 수업 시간에 우물쭈물하거나 영어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내가 큰소리로 대답하고 노래도 불렀다. 내 덕분(?)에 파닉스를 빨리 떼고 어린이 소설이었던 'little dragon'까지 오빠와 내가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도 1인분의 교재를 엄마께 좀 더 수월하게 팔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밝은 목소리로 영어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잘 따랐다. 관사에서 살면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엄마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매 수업시간마다 세련된 옷을 입었고 영어도 잘했다. '선생님은 외국사람이에요? 어디서 영어 배웠어요? 선생님이 제일 예쁜 것 같아요'라고 나는 선생님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과 진심을 가득 담은 칭찬을 했고 선생님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셨다.


새 교재로 수업을 하기 1주일 전에 항상 엄마는 선생님께 부탁해서 미리 새 책을 받았다. 그리고는 아빠가 출근하기 전에 아빠 구두 위에다가 새 영어 교재를 올려놓았다. 아빠가 퇴근하고 나면 회사에서 흑백으로 복사한 영어 교재가 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왜 나는 항상 흑백인 책을 봐야 하냐고 울기도 하고 대들어서 엄마 속을 상하게 한 적도 많았다. 엄마는 나도 오빠 나이가 되면 컬러로 된 영어책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엄마의 바람과 달리 오빠는 그 후로도 영어 공부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관사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좀 더 모아서 오빠와 내가 꾸준히 영어를 공부할 수 있게 뒷바라지하셨다. 몇 년 뒤 I로 이사를 왔고 그곳에서도 엄마는 관사에서 피아노를 가르치셨다. 가끔 관사 사람들로부터 피아노 학습비를 받지 못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피아노를 가르치셨다. 


그러던 어느 날 IMF가 터졌고 아빠의 대학 동기들은 40대 초반에 퇴직을 해서 귀농을 하거나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아빠도 15년 정도 남은 정년까지 버틸 것인가에 고민을 많이 하셨지만 결국 안정적인 월급 생활을 택하셨다. IMF를 겪으며 아빠 직업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예상치 못하게 아빠의 월급은 2배 이상 올랐다. 그러자 엄마는 Yoon선생님과의 인연을 끊고 내 손을 잡고 한 대형어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게 했다. 엄마는 정말 약속대로 나에게 컬러로 된 교재뿐만이 아니라 듣기 공부를 위한 테이프까지 따로 사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엄마한테 '오빠는?'이라고 짧게 물었지만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랬던 오빠가 같은 단지에 사는 조카 친구가 5세부터 영어 학원을 다녀서 영어로 대화를 한다고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단지 내에서 마주친 7세의 그 아이는 발음도 좋았다면서 본인의 딸과 비교를 하며 조급해했다. 생각해보니 조카 친구가 영어공부를 할 때 내 조카는 코로나 때문에 어린이집도 못 가고 거의 4개월 동안 우리 집에서 방목형으로 자라며 보고 싶은 만화영화만 실컷 보면서 먹고 잔 게 전부였다.


조카가 영어 학원에 가기 하루 전날 오빠는 조카의 영어 이름을 뭘로 할 것인지도 고민을 했다.


Sorita : 이름에 받침이 없으니까 한국 이름을 영어 이름으로 써. 나도 내 이름이 영어 이름이잖아!

오빠 : 그랬으면 좋겠는데...... 지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이름이 Sophia라고 이걸로 하고 싶다고 하네. 이름 괜찮니?

Sorita : 본인이 좋다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재택근무를 할 때 오빠는 조카를 우리 집에 맡겼다.

작년엔 식탁에서 강냉이만 주워 먹던 아이가 지금은 하루에 3장씩 학습지를 푸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신기했다. 글을 하나도 못 읽는 줄 알았는데 산수를 푸니 조카에 대한 기대심리가 전혀 없는 소고모 입장에서는 놀랍기만 했던 것이다.


Sorita : 고모 이름은 Sorita야. ** 영어 이름은 Sophia라면서?

조카 :......

 

조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Sorita : 영어는 재밌어? 한국인 선생님하고 외국인 선생님 있다면서? 한국인 선생님 이름은 뭐야?

조카 : Ms Cindy......

Sorita : 오! 여자 선생님이네! 그럼 외국인 선생님 이름은?

조카 : Wanna-min

Sorita : 뭐라고? 뭔 민?

조카 : (목소리를 높여서) Wan!-Na!-Min!

Sorita :????


조카는 외국인 선생님 이름을 '원어민'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오빠한테 외국인 선생님 이름부터 제대로 가르쳐줘야겠다고 카톡을 보냈다. 오빠가 피땀 흘려서 버는 영어 학원비 25만 원을 허투루 쓸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내 성격상 용납이 안 되는 사건이었다. 언젠가 내가 엄마가 된다면 아이들 교육에 억척스러운 학부모가 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다행히 그 후로 지금까지 Sophia는 그럭저럭 영어학원에 적응을 해서 잘 배우고 있다고 한다. 가끔씩 오빠가 조카의 영어 녹음 파일을 카톡으로 보내와서 어쩔 수 없이 한 번씩 들어보면 어렸을 때 오빠보다는 Sophia가 훨씬 낫더라.


엄마는 손녀가 영어를 배운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그때 그 Yoon선생님 교사분께 너무 미안하다고 하셨다. 한 사람 비용만 내고 나까지 들여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선생님이 아무 말씀은 안 하셨어도 속앓이를 했을 거라고 했다. 지금 형편이면 절대 그러지 않을 텐데 그때는 참 힘들어서 그랬다고 하셨다.


얼마 전 땅 사건 때문에 갑작스럽게 H에 내려갈 때 엄마는 H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H에서 들꽃 구경도 하고 한우도 먹자고 엄마를 꼬셨지만 엄마는 H에 핀 꽃과 나무들조차 꼴 보기 싫고 그 지역 음식도 입맛에 안 맞는다고 하셨다. 엄마로서는 그때의 그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7세의 Sorita는 Yoon 선생님 앞에서 항상 적극적이고 큰소리로 또박또박 영어를 읽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조용히 앉아있던 오빠와는 달리 나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엉덩이는 항상 들려 있었다. 그래야만 선생님이 내 쪽으로 시선을 한 번이라도 더 봐줬기 때문이다. 그때 선생님도 엄마가 오빠 수업료를 낸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마디도 하지 않던 오빠 눈만 마주치려고 애를 무진장 썼다.


'잘한다'라는 칭찬 한마디를 H에서 가장 예쁘고 세련된 선생님으로부터 듣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어린 Sorita의 책상은 수업이 시작함과 동시에 거의 항상 오빠의 책상과 나란하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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