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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r 31. 2021

궁금했던 아랫집 아저씨의 정체

대화로 해결한다는 것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어느 봄날이었다.

에어컨 바람보다 자연바람을 좋아하는 나는, 날이 따뜻한 봄날의 어느 밤에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잤다. 발끝을 살짝 간지럽히는 시원함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자연스럽게 잠이 드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을 얼마나 잤을까? 몸통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 남성의 엄청난 괴성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기울여봤다. 새벽 3시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집이 유일하게 한 곳 있었다. 그곳은 바로 내 방 아랫집이었다. 상황 파악할 것도 없이 부부싸움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다. 부부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일방적인 고함소리는 남자 쪽에서만 있었다. 짧은 시간만 들어봐도 아주머니께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듯 보였다. 중저음에 본인 성질을 제어하지 못하고 고래고래 악을 쓰던 목소리가 잠잠해지면 아주머니께서 항변하시는 듯했다. 하지만 곧 또다시 왕왕거리며 남자의 큰소리가 났다. '우리 엄마가~!'라는 단어가 몇 번씩이나 반복되는 것을 보니 싸움의 원인은 할머니인듯했고 아저씨는 본인의 와이프에게 이성을 잃고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아랫집 아주머니가 걱정이 됐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지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내가 사는 동에서 딱 두 집만 인사를 하고 지내는데 그중에 한 곳이 바로 아랫집이다. 나보다 7~8살 정도 많아 보이는 아주머니는 사내아이 두 명을 키우고 계신다. 아주머니께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두 아이들을 돌봐 주시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와 나는 출퇴근하는 시간이 비슷해서 현관 앞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가 종종 있었다. 만날 때마다 먼저 환하게 웃어주시고 내 안부를 물어주시는 아주머니께 나는 호감이 많았다. 퇴근길에 만나면 저녁은 뭐 먹을 것인지와 같은 소소한 안부부터 시작해서 각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보를 교환한 사이가 되었다.


작년에 7세 조카가 집에서 5개월간 지내는 동안 나는 가끔 아랫집에 가서 할머니께 간식거리를 전달했다. 주말에 꽃시장에 갔다 온 날이면 여러 종류의 꽃을 섞어서 아랫집에 선물로 드렸다. 혹시라도 층간소음에 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지 내려갈 때마다 죄송하다고 말씀도 드렸다. 그럴 때마다 내 조카보다 2~3살 많아 보이던 사내아이들은 '뛰는 소리 전혀 안 들려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나이 답지 않게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할머니도 '우리 집은 사내아이 둘을 키우기 때문에 다른 집 소음을 탓할 수 없다'라고 점잖게 말씀해 주시곤 하셨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결정이 되었다고 고정관념처럼 믿는 나로서는 그 두 명의 아이들을 항상 눈여겨보고 있었다. 단지 내에서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랫집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내 조카가 나중에 저 정도 되는 남자들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조카보다 내가 먼저 그런 이성을 만나야겠지만......


화목한 가정처럼 보이고 다섯 명이서 행복한 나날들만 보낼 것 같았던 아랫집에 '아빠'라는 사람이 새벽에 이렇게까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랫집을 왕래하면서 아저씨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찌 되었건 3시간 뒤에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하니 일단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까지 내린 다음에 잠을 다시 청했다. 하지만 아저씨의 고함은 내 방 안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이 세상에 나만 불행할 수 없으니 다 같이 힘들어보자'라는 악한 심보를 가지고 새벽 시간의 잠든 모든 사람을 깨우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이렇게 민폐를 끼칠 거면 창문이라도 닫고 소리를 질러야지 저 양반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었다. 불현듯 '혹시 본인 화를 주체 못 하고 불을 지르면 어쩌지? 화난다고 창문 열고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등등 불안한 생각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던 고함에 나는 지난 주말에 버스 타고 얼핏 지나쳤던 '청량리 정신병원'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자는 둥 마는 중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보니 어느새 알람이 울렸다. 평소대로 새벽 5시 50분에 일어났지만 간밤에 잠을 설친 나는 억울하고 분했다. 남자의 고함은 새벽 5시 즈음에서야 그쳤다. 커피를 마시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성격 장애가 있어 보이던 아저씨는 2시간 이상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소리를 지른 후에 화가 좀 풀렸을까? 잘생기고 예의 바른 사내아이 두 명을 키우던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평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사람과 같이 살고 있을까? 남의 가정사는 밖에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가 보다. 나는 씁쓸한 생각을 가지고 현관에서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렀다.


현관문을 열고 이미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아랫집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순간 '이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탈 사람은 아주머니뿐인데 그냥 비상계단으로 내려갈까? 마주치면 서로 불편할 텐데......'라고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잠도 못 잤는데 아침부터 계단으로 유산소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예상대로 바로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고 간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오른 아주머니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분은 그 상황에도 예전처럼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책에서 '퉁퉁 부은 두 눈'이라는 표현을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 봤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고, 상상 속 그 사람이 나와 친분이 있는 분이라서 더 당황스러웠다. 평소엔 몇 초면 1층까지 내려오는 그 시간이 그날은 몇 분 이상으로 길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쉴 새 없이 훌쩍거리시던 아주머니를 피해서 대각선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출근 잘하시라는 아침 인사를 서둘러하고 나는 도망치듯 현관을 빠져나왔다. 아주머니께서 그 날 회사일은 잘하셨는지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아주머니의 남편이자 내 조카의 남편감으로 찍어둔 두 사내아이들의 아빠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여기서 1년 동안 살면서 아저씨를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새벽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모습을 상상해보건대 '못생기고 배불뚝이에 대머리가 아닐까?'라는 추측만 했을 따름이었다. 엄마도 아랫집 아저씨를 궁금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시장가실 때 가끔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데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필라테스를 마치고 평소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한 아저씨가 빠른 걸음으로 내 앞을 가로질러갔다. 캐주얼하게 차려입은 아저씨는 내가 사는 동으로 재빨리 걸어갔고 내가 따라 들어오는 것을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 순간 저 아저씨가 아랫집 아저씨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저씨는 유리로 된 현관문을 살짝 열고 쫓기듯이 본인 몸만 휙 들어갔다. 나 역시 '저런 인간이 우리 아파트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재빨리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신경 써서 유리문을 잡아줄 거라는 기대도 안 했다. 나의 빠른 판단 덕분에 유리문이 내 얼굴에 부딪히는 것을 들고 있던 노트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아저씨와 단둘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때에는 이번에는 내가 그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그는 초조한 듯 올라가는 숫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아랫집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던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평범한 직장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저씨보다 20살은 어린 Y도 기본적인 매너나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 조심스럽다. 그런데 40대 중후반은 되어 보이는 아랫집 아저씨 밑에서 어떻게 올바른 두 사내아이가 자랐는지 의문이다. 가끔씩 퇴근길에 마주친 아주머니의 어두운 얼굴이 일의 고단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만약 나라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고 싶을까?' ' 차라리 혼자 벌어서 혼자 마음 편히 먹고사는 것도 남들과는 다르긴 하지만 아주 나쁜 삶은 아니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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