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간방 박씨 Mar 04. 2021

어쩌다 떠나게 된 올해 첫 여행 下

작업자의 실수였다고 사과는 받았지만 이미 뽑힌 내 나무는 어쩌지?

H에서 살 때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관사 바로 옆에는 엄청나게 큰 운동장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매일 신나게 놀았다. 그 운동장은 과거 공동묘지 자리여서 땅을 파면 유골이 나온다는 얘기도 있었다. 어린 호기심에 땅을 파본 적도 많았지만 한 번도 유골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밤이면 오빠 친구들과 밤 9시까지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고, 관사 A동과 C동을 잇는 큰 계단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친구들과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에서의 모든 장소와 순간들이 내게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관사 길 건너편에는 군부대가 있고 (Y가 운전병이었을 때 딱 한번 왔었다고 한다) 군부대 바로 옆에는 교도소가 있다. 그리고 관사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더 올라가면 C 전문대학이 있다. 관사에 살던 아주머니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던 엄마의 가장 큰 바람은 오빠와 내가 공부를 잘하고 올바르게 성장하는 것 딱 두 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에게 항상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을 하라고 했다. 엄마가 내게 준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1) 지금처럼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하면 관사 근처에 있는 C 전문대학에 갈 것이다

2) 오빠 친구 2학년 3반 **처럼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문구점에서 물건을 훔치면 H교도소에 갈 것이다

3) H에서 평생 살고 싶지 않으면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서울로 가던가 해외로 나가라


엄마는 자식들을 통해서 삶의 희망을 찾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엄마가 그리던 큰 그림과 달리 7세 당시 나의 목표는 소박했다. 그것은 바로 학습지에 숫자 '8'을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칸 안에 맞춰서 적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배달 오는 신문 안에 전단지가 많았다. 나는 전단지 뒤편에다가 숫자'8'을 수십 번도 더 그려가면서 연습을 했다. 그리고 얼른 어른이 되어 읍내에서 파는 빨간 손목시계를 아빠처럼 왼손에 차고 싶었다. 장날마다 리어카에 가득 진열되어 있던 시계 앞에서 떼를 쓸 때마다 '시계도 못 보면서 왜 고집 피우냐'라고 엄마한테 혼이 났다. 그래서 아빠가 퇴근하시고 나면 아빠와 '**시 **분 **초'까지 읽는 연습을 고장이 난 시계를 가지고 공부했다. 언제부터 숫자'8'을 잘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시간을 정확히 읽게 된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엄마가 바라는 대로 나는 성장하지 못했고 엄마를 실망시키는 일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은 서울로 왔고, H교도소에 가서 교도관이 번호로 내 이름을 부르는 대신 회사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소과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코로나 이전까지 해외를 남들만큼은 다녀봤으니 아주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고 본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H는 여전히 아주 조용한 동네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동네 모습이 거의 사라지고 주변 환경도 너무 많이 바뀌어서 네비 없이는 정확한 장소로 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KTX를 타는 대신 4시간 동안 운전해서 H에 도착했다. 목적지를 땅 주소로 찍고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너무 배고팠다. 아침에 고구마 1개와 커피 세 잔을 마시고 오후 1시까지 버티다 보니 내 땅 절도범과 제대로 맞서지 못할 것 같았다. 적당히 밥 먹을 장소를 찾아서 이동을 했는데 '적당한 식당'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깔끔해 보이는 식당에서 한우 갈비탕을 시켰다. '고기 가지고 장난치면 3대가 망한다'라고 써 놨던데 이게 12,000원이다. 차라리 수입산 갈비탕으로 배 터지게 먹는 편이 낫겠다


밥을 든든하지 않게 먹고 나서 땅으로 향했다. 다행히 소작농 할아버지께서 마스크를 쓰고 오셨다. 그분이 내 땅에다가 고구마를 심어야 하는데 엄한 보리가 심어져 있어서 서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Sorita : 이 보리 심은 사람은 누구예요? 제가 나무도 103그루 심어놨는데...... 세상에 최소 40그루는 그 사람이 말도 없이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보리를 심었네요!

할아버지 : 보리 심은 사람도 외지인이에요. 연락처를 몰라


보리 주인이 어디 주공아파트에 산다는 것만 알고 연락처를 모르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이거 뭐 'TV는 사랑을 싣고' 리포터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든 찾아서 해결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그 사람이 멋대로 뽑은 내 나무 40그루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자리에 다시 심어놓으라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땅의 10%를 침범해서 보리를 심어놨다. 이 땅은 빨리 처분하고 싶었지만 주변 환경이 몇 년 전과 다르게 또 변화하는 것을 보니 좀 더 지켜보려고 한다


결국 보리를 심은 사람과 만나지도 못한 채 두 번째 땅으로 향했다.

두 번째 땅으로 가는 길은 어렸을 적 기억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초등학교 때 소풍 갔던 산이었다. 차에서 내려서 신발을 갈아 신고 땅으로 올라갔다. 발이 푹푹 꺼지는 땅을 걸어서 올라가니 평소 걷는 것보다 에너지 소비가 몇 배로 더 드는 것 같았다. 물에 적신 한우 몇 점은 이미 소화가 다 되고 뱃속에서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다 둘러보고 갈 작정으로 꿋꿋하게 산길을 올라갔다. 대낮이었지만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면서 걸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 땅에는 인삼을 재배하고 있어서 보리 따위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인삼밭 바로 앞에 큰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서는 모양새다. 산 뒤쪽으로 공사를 하는지 망치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보리를 본 후에 여기에 오니 명치가 답답하던 것이 좀 트였다
길 건너편에 이응노 화백 미술관이 생기고 주변에 음식점이 많이 생겼다. 땅 바로 앞으로는 길이 생기려나보다. 정체모를 돌무더기도 잔뜩 쌓여있었다. 큰 건물이나 들어섰으면 좋겠다


땅을 둘러보고 나서 읍내와 내가 3년 간 다닌 초등학교를 둘러보고 싶었는데, 이응노 화백 미술관을 보자마자 추억 여행은 다음에 하는 걸로 과감히 미루었다.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이응노 화백 그림과 생가를 땅 바로 건너편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관람객이 없어서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었고 미술관 관람료도 무료였다.


이응노 화백이 사용한 화구다. 생각보다 작품 수도 많았고 비디오 관람실도 있어서 정말 좋았다. 여기서 이렇게 뵙게되니 영광입니다!!
건물 자체가 예술적으로 지어졌다. 우수건축물이라고 써 놨더라! 가을엔 핑크 뮬리가 뒤덮인다고 하니 가을쯤에 다시 와봐야겠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 주소를 네비에 찍으니 H에서 가장 번화한 신도시를 가로질러서 가는 길로 안내해줬다. 뉴스에도 종종 나오는 핫한 곳이라서 차로 한 바퀴 둘러보니 새 건물 냄새가 차 안까지 풀풀 풍기는 듯했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관광호텔에서 1박 2일로 여유롭게 머무르며 온천욕도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한 때는 내가 살던 4층짜리 관사가 H에서 처음으로 건설된 아파트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이들 손 잡고 '아파트' 구경을 오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의 어느 아파트 못지않게 고층 건물들이 신도시에 많이 들어서 있었다. 몇 년 더 지나면 별다방도 하나 생길 수 있을까?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세련되고 눈에 익은 건물들이 보였다.

당일치기로 다녀온 짧은 추억 여행이었지만 서울의 모습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20대 초반의 내가 한강에 비친 수많은 불빛들을 보고 H에서 걱정 없이 살았던 때를 그리워했던 그 기억이 잠깐 떠올랐다.


지금도 엄마는 H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었다고 하신다. 당시 30대였던 엄마는 장날마다 내 손을 잡고 다니면서 H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영국에 계신 이모가 가끔씩 보내주는 버버리 옷을 나에게 입혀줄 때에는 런던의 빅벤 사진을 같이 보여주며 '너도 이모처럼 영국에 꼭 가봐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때는 엄마의 희망사항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엄마가 계획한 대로 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엄마의 많은 희생과 지원 덕분에 나는 엄마와 달리 내 인생을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몇 가지 선택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른 적도 있었고 그 무게감은 내 숨통까지 조여왔다. 숫자 8을 완벽하게 쓰기 위해 연필을 꽉 쥐고 이면지에 연습을 해왔던 것처럼, 화려한 도시 서울에서 적응하고 '남들만큼'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참고 그리고 노력을 해야 했다.


한 때 나는 서울에서 절대 반짝이는 존재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절대 주연으로 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적당히 조연으로 사는 삶도 나쁘진 않더라


땅 사건은 포클레인 기사의 실수로 내 땅까지 밀어버린 해프닝으로 끝났다. 보리 주인은 땅 주인이 아니라 임대 경작하는 사람이었다. 군청에서 그 사람에게 당신 땅이 아니니 복구시켜 놓으라고 해서 보리 주인은 밭두렁만 복구를 시켜놓고 나에게 상황 설명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화를 하려고 하니 군청에서 개인정보라서 연락처를 알려줄 수가 없다고 해서 지금까지 전화를 못했다고 한다. 오늘 정확한 지적도를 보내 달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보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하니 평화롭게 잘 해결이 된 걸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한다.

이미 뽑혀서 버려진 나무 40그루는 그냥 잊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다 떠나게 된 올해 첫 여행 上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