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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r 01. 2021

어쩌다 떠나게 된 올해 첫 여행 上

땅을 지키자

근무를 하던 도중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가 H에 살던 8세 아빠는 두 구역에 땅을 구입하셨다. 당시 아빠는 이 땅에 많은 기대를 하셨다. 하지만 지금까지 땅값이 많이 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땅은 몇 차례나 골치 아픈 문제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요즘 좀 불안하게 잠잠하다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땅 한 곳에다가 누가 보리를 심어 놓았고, 땅 옆에 농로까지 만들어 놓았다는 신고전화가 나에게 들어왔다.


아빠가 발령을 받아서 H에서 I로 이사를 올 때 우리는 땅을 처분하지 않고 왔다. 우리 땅이니 별 일이 있겠나 싶었지만 별 일이 많이 생겼다. 아빠와 잘 알고 지내던 아저씨 우리 땅의 흙을 몰래 파서 본인의 땅으로 가져갔다. 그 이후에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뉘신지 모를 무덤 몇 개가 우리 땅에 덩그러니 덤으로 생기는 해프닝이 있었다. 흙을 공짜로 가져간 대신 묘 몇 개로 흙 값을 대신한 것이었을까? 시골 사람들이 순박한 건지 무지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런 일들이 황당했다. 그렇다고 사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몽둥이를 들고 H에 와서 하루 종일 땅을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 대신 소작농에게 땅을 맡기고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을 해주는 조건으로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한 때는 리틀 포레스트의 삶을 꿈꾸며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H에서 새소리나 들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았다. 왜냐하면 3세 때부터 10세 때까지 H에서 살았던 모든 기억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H에 당일치기라도 놀러 가는 것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엄마는 H에서 본인이 선택하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셨다. 엄마는 대학 졸업 후 한 회사에 취업을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뒀다. 아빠보다 엄마가 훨씬 더 돈을 잘 벌 수 있었지만 그 시대에는 여성에 대한 기준과 잣대가 있었고 (지금도 물론 그 잔재가 남아있지만) 엄마가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분위기도 있었던 듯하다. 


내가 1N 년 간 사회생활을 해 보며 가장 크게 얻은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고 싶은 공부든 원하든 일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되면서 사회적으로 독립을 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 경제적으로도 독립이 될 수가 없었다. 엄마 스스로 설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살아가면서 수없이 좌절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엄마는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어렸던 내 앞에서도 여러 번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정작 아빠는 정년퇴직 후에 땅이 있는 H에 가서 큰 평수의 아파트를 구입해서 남은 인생을 여유롭게 살아볼 계획도 하셨다. 하지만 H에 가서 살 거면 아빠 혼자 가라는 엄마의 단호함에 결국 두 분은 서울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게 되셨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면서 H에 주기적으로 가서 땅을 관리하기는 이제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 땅에 소작농을 두고 관리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작인으로부터 난데없이 우리 땅에 보리가 심어져 있고 농로까지 생겼다는 연락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은 동네방네 그 땅이 본인 소유라고 주장하고 다닌다고 한다. 회사 일만 아니었다면 다음 날 당장 내려가서 상황을 보고 그 사람을 만나서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 휴가를 낼 수도 없어서 나는 주말에 H에 내려가기로 계획을 잡았다. 어쩌다 보니 올해 첫 지방 여행을 3년 만에 H로 가게 되었다.


얼마 전 Y랑 만났을 때 H에 살았던 얘기를 하면서 땅 얘기를 했었다. H에서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한 Y는 나보다 훨씬 더 H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절대 그 땅을 팔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몇 주 뒤에 땅을 보러 가게 될 일이 생기게 될 줄 몰랐다. 회사 일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바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왜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나에게 생기는 걸까? 나는 Y에게 카톡을 보내서 하소연을 했다.


Sorita : 만약 그 사람이 뻔뻔하게 나오면 어떡하지? 남의 소유물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서 동네방네 다닌다는데 정상은 아닐 거 아냐? 난생처음 112 누르게 되는 건 아닌가 몰라!

Y : 아이고... 말로 잘 해결됐으면 좋겠네요 ㅜㅜ

Sorita : 그러게, 얼른 해결하고 오랜만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둘러보고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Y : 오랜만에 바람 쐬고 오셔요 ㅎㅎ


현재의 나는 엄마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달리 나는 사회적, 심리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 소과장이다. 그런데 당장 이번 주말에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을 텐데) 일을 해결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일어나지도 않은 여러 가지 걱정들이 앞섰다. Y한테 '오랜만에 H고등학교 둘러볼 생각 없냐'라고 꼬셔서 같이 가볼까?라는 생각도 아주 잠깐 했다. 왠지 옆에 '남자'가 있어준다면 쫄보가 아닌 척 더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법'을 전공하거나 배운 적도 없다. 하지만 내가 당해보니 내가 모르는 만큼 바보처럼 내 소유권을 뺏긴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조금씩 경험하고 있다. 남들에게는 티 나지 않게 쫄보가 아닌 척 법 테두리 안에서 지금까지 땅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고 날씨가 좋았던 토요일에 나는 H에 내려가게 됐다.

  

내 땅에 심어져있던 '문제의 보리'다. 어린 보리가 이렇게 생겼구나! 지금까지 다 큰 보리만 봐서 몰라뵀다. 땅 아랫부분에 외롭게 묶여있던 강아지가 나를 유난히 반겨줬다
나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던 고양이었다. 얼마 전 이 집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마치 고양이가 할아버지처럼 집 주변을 왔다 갔다 하고 의자에 앉기도 하며 사람처럼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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