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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May 04. 2021

책을 책으로 갚기

Y가 빌려준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감

Y를 처음 만난 건 크리스마스를 1주일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의 주인공은 Y가 아니었고, 내가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날 오전에 회사에 들렀다가 오후에는 외부 회의를 마치고 약속 장소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는 1주일 뒤에 있을 시험공부를 하느라 머리 용량이 모자랐던 탓도 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은 Y는 나와 대각선으로 앉았고, 별다른 얘기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다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Y가 아직 학생이라는 말에 나는 그가 아직 대학생인데 일찍 취업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학교가 대학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습게도 바로 한 달 전에 알게 됐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일들을 얘기한다

그때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던 얘기, 함께 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Y는 대부분의 것을 기억하는 듯 보이지만 내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인도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내 편을 들어준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상대를 배려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면 사람을 볼 때 나이와 학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음소거하고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곤 한다.

 

Y는 정체성이 여러 가지다.

회사에서 온 전화를 받을 때나 동료 또는 가족과 통화를 할 때 그리고 나와 얘기할 때의 모습은 전부 다르다.


Sorita : 네 정체성은 도대체 몇 개야? 가끔 보면 너무 다른 모습인 거 같아

Y : 전 일할 때와 쉴 때는 정체성이 다른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Sorita : 맞아.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걸 집까지 가지고 오거든. 난 그 정체성을 분리하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 넌 지금 굉장히 잘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만약 Y가 나와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는 친구였다면 그와 이렇게까지 친해지지는 못했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회사에서 소과장이고 내년에는 진급을 앞두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다니는 이 곳이 엄청나게 좋은 회사라서 내가 장기근속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일만 하는 거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서 지금의 월급 받는 무게를 감당하기까지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다.


코시국 이전에 업계 사람들과의 모임이나 식사 자리를 가질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런데 한참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힘들 때라 그런지 밥 먹을 때조차 일 관련 얘기가 오고 가는 것을 절대 좋아하지 않았다. 그땐 지금보다 더 삐딱했기 때문에 타회사 사람 중 누구 하나가 목소리 톤을 높이며 본인이 일을 얼마만큼 했는지 자랑삼아 얘기를 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고만고만한 회사에서 그 정도 매출로 자랑삼아할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러나 싶어서 공감해주는 대신 밥만 먹다 보니 내 앞의 불판에만 고기가 유독 빨리 없어졌다.


게다가 누군지도 모르는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일과 내 소중한 거래처들과의 업무 얘기를 들려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 생활에 대단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드라마 미생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이 나에게 본인이 회사에서 얼마나 힘든지 얘기를 털어놓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서울에서의 삶을 지금처럼 유지하기 위해서 그냥 버텼기 때문이다. 남의 힘듦을 받아줄 정도로 내 인내심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그런 나에게 Y와 그의 세계는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가 주말이나 명절에도 일을 하는 게 아직도 신기하고, 당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렸을 때 아빠가 당직 서던 것도 생각이 났다. (엄마 손잡고 한밤중에 아빠 당직실에 들어가서 손 흔들고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다) Y는 나와 아주 동떨어진 세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본인의 일에 대해서 힘들다거나 부정적인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사람 대 사람으로 각자의 얘기를 덤덤하게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Y는 나에게 본인의 직업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거라며 책 한 권을 빌려줬다.

보통 책을 빌려주면 본인이 먼저 읽어서 손때도 타고 종이도 구깃구깃해야 맞는 건데 Y가 빌려준 책은 거의 새것이었다. 나는 평소 좋은 문장이나 마음에 와 닿는 글은 필사를 하고 있는데 너무 깨끗한 책이다 보니 쫙 펼치기가 마음에 걸리고, 필사를 하다가 만년필 잉크가 책 위에 떨어질까 봐 꽤나 조심하게 됐다.


본인의 작은 책장에서 '작고 가벼워서 들고 가서 읽기 좋을 거다' 라며 빌려준 그 책을 퇴근 후 3일에 걸쳐서 다 읽었다.


올해 최소 10권의 책을 읽기로 다짐했었는데 Y가 빌려준 책을 첫 번째 타자로 읽게 됐다.


1권 / 10권. 경찰관 속으로


기억나는 문장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힘이 없어.


 마음이란 것에 형태가 있다면 누군가 그 마음을 사포로 박박 문지르는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어


 교육이 왜 존재하는지는 알 것 같던 밤이었어.

 적어도 세상을 깜깜하게만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할 수 있는 말이 많아지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발걸음을 옮길 곳이 넓어지도록 하는 원동력. 결국 민들레 홀씨를 날려주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를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주는 바람과 같은 역할. 그게 교육의 중요성이며 존재 가치가 아닐까.


얻은 지식

경찰은 민사 관계엔 개입할 수 없어. 형법상 다룰 수 있는 범죄, 즉 형사관계에만 개입. 만약 이 사람이 처음부터 요금을 지급하지 않을 생각으로 기사님을 속인 뒤 택시를 탔다면 사기죄, 기망행위가 없었지만 요금 지불을 하지 않겠다고 우길 경우엔 무임승차로 통고처분을 한다.

 (기망행위 : 사기죄의 행위는 기망행위이다, 통고 : 서면이나 말로 소식을 전하여 알림)


소감  경찰 준비생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고 정말 본인과 맞는 길인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여기 담긴 글이 한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과 견해이니 전체 조직의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엔 밝음과 어둠이 있는데 이왕이면 해바라기처럼 밝음을 더 보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다. 만약 일을 하면서 본인 스스로가 어둠에 동화되어 자신의 인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쁜 Y가 언제 시간을 내준다면 빌린 책을 돌려주면서 이번엔 내가 책을 빌려주려고 한다. 책을 그동안 너무 멀리했더니 어떤 책이 좋을지 몰라서 닥치는 대로 9권의 책을 골라봤다. 매일매일 자기 전 30분이라도 책을 꾸준히 읽고 최종 한 권을 선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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