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가 혼자 사는 집에 방문한 것이었다. 아마 그때 그 기억이 썩 재밌지 않았던 것 같다. 유쾌했다면 몇 번의 기억이 더 있었겠지?
친한 회사 동료 집에 놀러 갔을 때도 내 집만큼 편안하지 않았다. 잘 닫히지 않는 화장실 문이나, 식탁이 없어 낮은 밥상에서 차를 마셔야 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는 빨리 집에 오고 싶었다. 여행을 가서도 내 또래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며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인연을 맺을 때, 나는 돈을 더 내고서라도 조용한 호텔에 가는 것을 선호했다. 호텔비가 게스트하우스보다 몇만 원 더 비싸더라도 나는 차라리 여행지에서 먹고 마시는 몇만 원을 아끼고 그 돈으로 숙박만큼은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원룸과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마음에 맞는 친구들 몇 명만 초대했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 역시 나를 그들의 집에 초대하는 것보다는 본인들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을 더 좋아했다. 집에서 차든 커피든 마음껏 먹고 넓게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 방문했던 친구들은 동성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아파트에 혼자 사는 것을 알게 된 전 남자 친구는 내가 사는 그 집에 너무도 오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내가 사는 집의 문턱을 넘기 쉽지 않았다. 그 당시엔 그 친구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그 친구와 나의 미래를 생각하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놈의 몹쓸 정에 이끌려서 '집에서 차 한잔만 달라'라고 끈질기게 요청하던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역시 내 공간에 들어왔다. 그 친구는 집안 곳곳을 구경하며 그가 구상하는 여러 가지 미래를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와 내 미래를 함께 할 확신이 없었다. 물론 내 속마음을 그에게 대놓고 표현한 적은 없었다. 딱 한 번만 집 구경을 하겠다던 그는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내 공간에 들어오고 싶다고 졸라댔고, 매번 거절을 해야 하는 피곤함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난 후 허전하고 때로는 심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개운했다. 그와의 연애를 통해 나는 인생의 큰 교훈을 하나 얻었다.
절대 집에 남자를 들이지 말아라
삼류 드라마나 뉴스에 나올만한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은 절대 없으니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나 평생 함께할 사람이 아닌 이상 여자 혼자 사는 공간에 '딱 한번'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다.
내가 사람들을 집에 쉽게 끌어들이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누군가가 밖에서 입고 들어온 옷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내 소파나 침대에 걸터앉는 것을 무지하게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와 코시국까지 겹친 덕분에 지금 새로 이사를 온 집에는 가족을 제외하고 아무도 내 공간에 들어오는 일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지인들은 내가 **구에 사는 것은 알아도 **동 어느 아파트에 사는 것까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곳의 **구 *** 아파트 ***동 ***호까지 정확한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딱 두 명 있다. 한 사람 (조직)은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 인사팀이고 또 다른 사람은 바로 내 브런치의 단골손님 Y다.
Y에게 집주소를 알려주게 된 이유는 너무 단순해서 차마 얘기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어쨌든 올해 3월 말로 Y도 서울 시민이 됐고, 이사한 곳이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으니 나는 그에게 한번 보자고 연락을 했다. Y도 흔쾌히 '밖에서 밥을 먹고 차는 본인 집에서 마시자'는 메시지를 나에게 보냈다. 단순한 메시지였지만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노트북에 팝업으로 뜬 '차는 집에서 마시자'라는 그 한 문장에 일하다 말고 주책없이 설렜다.
평소 나라면 이성이든 동성이든 남의 집에 가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이 맞는데, Y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난 2월에 그가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던 본인의 집을 계획대로 잘 꾸며놨는지 보고 싶었다. Y는 근무를 마치고 만나자고 했지만 나는 그 날 휴가를 냈다. 하루 휴가를 냈지만 오후에 외근을 다녀와야 했다. 그래도 휴가인데 외근을 가기 전 오전 시간을 그냥 집에서 보내기 아까웠다. 나는 신사동에서 일하고 있던 친구와 만나서 맛있는 탄탄면을 먹고 압구정 H백화점까지 걸어갔다. 그곳에서 내가 생각했던 Y의 집들이 선물과 함께 간식거리를 바리바리 사서 들고 일하러 갔다. 지하철과 택시를 번갈아 타며 한남동에 겨우 도착해서 일을 마치니 오후 2시가 좀 안된 시간이었다.
Y가 5시 30분에 보자고 했기 때문에 나는 중간에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태원에서 그동안 가고 싶었던 빵집 투어를 두 탕 뛴 다음에 멋진 카페에 가서 여유 있게 맛있는 커피 한잔을 했다. 두 손 가득 짐이 많아서 어디를 돌아다니기 힘든 상황이었다. 좀 이르긴 했지만 지하철을 타고 오후 3시에 Y네 동네로 이동했다.
Y가 사는 곳은 내가 종종 산책 삼아 가던 곳이었다.
남은 2시간 30분을 어디서 보낼까 하다가 근처 카페에 가서 동네 검색을 했다. 지척에 미술관이 있었는데 네이년에 적힌 후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무료관람이라고 하니 평일에 예상치도 못했던 미술관 투어를 가기로 결정했다.
미술관을 코 앞에 놓고도 반대쪽 길로 한참을 헤매다가 두 손이 꽁꽁 언 채로 미술관에 도착했다. Y에게 줄 집들이 선물만 들고 있어도 묵직했는데 이태원에서 빵을 10개나 사서 짐이 상당히 많았다. 미술관에 들어가자마자 친절하신 직원분이 짐을 받아 주셨고 체온 측정과 인적사항을 적는 것을 도와주셨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체온이 떨어진 걸까?
손바닥 체온 측정 불가라고 에러가 뜨는 바람에 다른 체온계가 내 이마로 향했지만 앞으로도 접하고 싶지 않은 영어 단어 'error'가 자꾸 떴다. 마지막 방법으로 귀 속 체온을 쟀더니 생존해 있는 인간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숫자가 떴다. 체온만 재는데 10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동원했다. 나는 체온계에 적힌 낮은 숫자를 그대로 적었고 무거운 짐을 맡긴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술관을 둘러봤다.
주택가 사이에 작은 미술관이 있었다. 날이 조금만 더 따뜻했고 옥상에 의자가 있었다면 좀 쉬었다 올 수도 있었을텐데 아쉬웠다
미술관 안에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한여름이면 잎이 울창해서 미술관을 감싸주는 지붕이 될 것 같다. 다소 단순해보이는 조각상이 건물에 있었다
종교적인 작품이 많았다. 작품을 최대한 천천히 둘러봐도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체온측정에 10분, 관람에 10분을 소비한 후 나는 다시 걸어나왔다
짐을 들고 어디 갈 곳도 없어서 Y가 알려준 식당을 찾아서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빈티지 샵이 있어서 구경했는데 내 또래의 한 분이 시댁 선물이라고 57만 원어치의 그림과 소품을 구입했다. 어떤 시댁이길래 이런 선물을 하는 걸까? 빈티지 구경보다 그 사람이 물건 사는 걸 보는 게 더 재밌었다.
슬슬 Y와 만날 시간이 되어 레스토랑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여유 있게 나왔다 싶었는데 주변에서만 20분을 맴돌아서 약속 시간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았고 휴대폰 배터리마저 15%로 밥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이 상황이 황당해서 Y에게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겠고, 식당도 못 찾겠다고 카톡을 보냈다.
Y : 지금 앞에 보이는 게 뭔가요!
Sorita : 앞에는 경찰서 있고 내 뒤에는 별벅스랑 은행이 있어!!!! (산에 가면 비상시 내 위치를 알 수 있는 표시로 '85-가' 이런 식으로 적혀있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Y : 뒤에 저 있어요 ㅋㅋ
다행히 버스에서 막 내린 Y를 만나서 식당에 갈 수 있었다.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이라고 하더니 정말 가정집처럼 간판도 작고 식당 위치가 골목길 모퉁이에 있어서 찾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지금까지 거래처 접대를 하면서 웬만한 파스타는 먹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은 음식이 생소했다. Y는 직원에게 맛있는 걸로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내가 안먹는 음식 중에 가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가지랑 다른건가? 파스타는 새우 비스큐였는데 새우 손질이 잘 되어 있어서 먹기 편했다
소꼬리 라구 파스타도 처음 먹어봤는데 '소스 비법이 뭡니까?'라고 묻고 싶었다. 작은 식당에 우리밖에 없어서 여유롭고 조용했다. 창 밖으로는 10억 짜리 오피스텔이 있었다
Y는 회사에서 점심이 매우 잘 나와서 많이 먹고 왔다고 했지만 배가 고픈지 정말 잘 먹었다.
우리 부서 직원들보다 훨씬 잘 먹는 거 같은데 몸에는 군살이 없고 얼굴은 살이 더 빠진 것 같았다. 이번에도 또 Y가 밥을 사려고 해서 본의 아니게 카운터에 내 카드를 던졌다. 직원이 음식 맛있었냐고 묻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는 접시를 싹싹 다 긁어서 맛있게 먹고 나왔다.
Y는 집에서 차를 먹자고 하더니 집 앞의 별벅스로 가자고 했다.
Sorita : 집에 티백차 있잖아? 그걸로 마시자. 돈 쓰지 말고
Y : 아니에요. 저녁은 사주셨으니 차는 벤티 사이즈로 마셔요
Sorita : 그럼 별벅스 티백을 사자. 한 상자에 20개는 들었으니까 네가 2주는 먹을 수 있어
Y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내 손에는 벤티 사이즈의 차가 들려있었다. 차를 한잔씩 들고 Y의 집으로 걸어왔다.
계단을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올라가더니 부리나케 부엌에서 빵도 썰어가지고 내어왔다. 그러고보니 나만 벤티사이즈였네. 멀리 Y의 집들이 선물도 찍혔다. 선물은 비밀!
Y는 영혼을 쏟아서 집을 꾸몄다고 했다.
지난번에 내 집에 어떤 화분이 있냐고 이것저것 묻더니 Y도 좁은 공간에 다양한 화분을 참 많이 놨다. 투룸이었는데 침실과 서재로 야무지게 꾸며둔 것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방 하나는 퀸 사이즈 침대 하나와 큰 화분이 들어가니 공간이 다 찼지만 그래도 그가 퇴근하고 푹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실 밖으로 창이 또 있었는데 그곳에는 유럽식으로 허브를 키우고 있었다.
Y는 본인 집에서 가장 편한 의자 (유일하게 등받이가 있던 의자)에 나를 앉으라고 했고, 안방에서 조명도 들고 와서 켰다. 기분에 따라서 조명 색깔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더니 그 날은 은은한 노란빛을 켜고 중문을 닫았다. 남자 자취방에 두 번째 방문한 것이긴 하지만 첫 경험 때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와 고요함에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로 몽환적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 공간은 절간같이 조용한 것 같았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그 건물에 한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걷는 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 퍼졌다. Y와 몇 번 만나면서 내가 항상 말을 많이 한 것 같은데 그 날은 Y가 마치 말을 준비해 둔 것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참 많이 했다. 물건 하나하나를 봐도 그의 취향이 뚜렷해서 혹시라도 집들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Sorita : 퇴근하고 걱정거리까지 씻어버리라고 엄청 고급진 손 세정제를 살까 하다가 이거 샀거든......
Y : 아니에요. 저 지금 손 세정제 엄청 많아서 1년 넘게 쓸 것 있어요. 손 세정제보다 이게 훨씬 나은데요! 와! 너무 고급진 선물이네요
Sorita : 외국에서도 이 동물이 미신처럼 여겨지거든. 앞으로 좋은 일만 있고 큰사람 되라는 의미야
Y는 답변이 좀 느릴 때가 있지만 항상 충분히 생각을 하고 대답을 하는 것 같아서 좋다. 그는 내가 아직까지 가지고 있지 못한 '상대의 기분을 먼저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참 얘기를 하다가 본인보다 한 살 더 많은 선배가 곧 결혼을 한다고 했다.
Sorita : 네가 있는 곳은 결혼을 다들 일찍 하네. 내가 다니는 회사는 결혼이 다들 늦거든
Y : 그러게요. 다들 일찍 결혼하는 것 같아요!
Sorita : 본인이 외롭거나 뭔가를 상대방으로부터 충족하기 위해서 서둘러 결혼을 하는 건 좋지 않은 거 같아
Y : 맞아요. 저도 저 스스로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때 결혼하려고요
Sorita : 넌 지금 결혼해도 상대를 배려하며 잘 살 것 같아. 내가 문제지 뭐
그러자 갑자기 Y는 일어나서 책 한 권을 빼서 좋은 구절이 있다며 읽기 시작했다.
읽기 전에 조명 색깔을 환하게 밝혔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상처입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당신으로부터 밀어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중문을 닫은 아주 작은 공간에서 책의 몇 구절을 조용히 읽는 Y의 목소리를 들으니 라디오에서 책 읽어주는 남자 같았다. 이런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 보지를 않아서 또다시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도 잠시, Y는 나에게 물었다.
Y : 이 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Sorita :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막상 실천하는 게 어려울 것 같아. 그리움과 외로움은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은 감정이니까......
그 순간 적막을 깨고 Y의 핸드폰이 울렸다.
Y는 누군가에게 전화하지 말고 카톡으로 하라고 대답을 짧게 하고 금방 전화를 끊었지만 곧 또다시 전화가 왔다. 후배님 세 분이 갑자기 Y의 집으로 오겠다는 연락이었다.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 나도 시계를 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Sorita : 내일 당직이라며? 일찍 자야 하잖아? 빵 좀 두고 갈 테니까 오면 같이 먹어
Y : 안돼요. 딱 봐도 고급진 빵인데 주신 거 혼자 먹을게요
Sorita : 그나저나 여기 건물 사람들은 든든하겠다. 안전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오늘 밤엔 네 명이나 있는 거잖아
Y : 그렇네요
오늘은 스스럼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Y를 보며 그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고 생각했다.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따라 나온 그는 헤어지기 직전에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Y : 그런데 Sorita님이 하시는 일은 뭐예요?
Sorita : 응???? 나???? 저기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난 거 아니잖아요?
Y가 집에 가는 길에 읽어보라고 빌려준 책을 품 안에 안고 지하철에 앉아서 잠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