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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Aug 18. 2021

귀신의 집 下

본래의 모습을 찾은 딜쿠샤이지만 살짝 아쉬운 부분도 있다

Sorita : 3번 출구를 막아놓고 11번 출구로 나가래. 출구가 바로 앞인데 삥 둘러가게 생겼어!
Sorita : 이게 지금 상황...
Sorita : <사진>

Y : 아이고.. 죄송하게 됐네요

Sorita : ㅋㅋㅋㅋ네가 뭘 죄송해. 이 시국에 시위하는 사람들 잘못이지 뭐


딜쿠샤에 방문하기로 한 그날, 목사님이 예고한 집회에 대비하여 사대문 안 대표적인 지하철 역 출입구에 셔터가 내려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나갈 수 있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역에서 내렸지만 내가 나가려고 했던 출구는 막혀 있었다. 결국 10분 이상을 역 안에서 더 걸어야 하는 생뚱맞고 목적했던 장소보다 훨씬 더 먼 곳으로 나가야만 했다.


11개의 출구 중 허용된 출구 단 두 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딜쿠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했다. 어르신들은 갑자기 봉쇄된 출구에 전혀 예상치 못한 출구로 나와서는 **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며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있었다.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큰 지하철 역 안에서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만나기로 한 지인들과 통화하며 서로 멘붕이 오신 듯했다.


그런데 두 번째 관문이 또 있었다.

겨우 빠져나온 지하철 역사 뒤 골목길에는 내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차례로 검문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생각지도 못한 고민에 빠졌다. '어디 가는 길이냐고 나에게 물으면 '딜쿠샤요!'라고 정직하게 대답할 건데 과연 이 분들이 딜쿠샤를 알까? 아니다! 꼭 정답을 얘기할 필요는 없지. 딜쿠샤 근처에 있는 큰 건물을 얘기해야겠다!'라고 선글라스 안에서 두 눈동자를 굴리며 누구나 들으면 다 아는 장소를 물색해봤다. 하지만, 딜쿠샤 주변은 오래된 빌라뿐이었고 그곳 근처에 딱히 이름 있는 건물도 없었다.


그런데 출근 복장의 회사원들까지 사원증을 제시하며 전부 검문을 받았지만 웬일인지 나는 그냥 통과가 됐다.


Sorita :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검문하길래 긴장했는데 난 안 물어보네? 이거 은근히 떨리더라

Y : 걱정하지 마세요. Sorita님은 잡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     


Y는 목사님 집회랑 상관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 무더위에 그도 고생을 하고 있었다. 목사님이 그토록 부르짖는 신이 정말 있다면, Y가 이 혼란 속에서 무탈하게 일을 마칠 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집회가 아니라도 딜쿠샤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 딜쿠샤에 주차 공간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독립문역이나 서대문역에서 하차 후 걸어 올라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통이 불편하지만 번잡하고 시끄러운 종로에서 벗어나 잠깐 동안이라도 진짜 종로의 뒷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며, 한적한 이 길을 즐겁게 사람들이 걸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김구선생님께서 총 맞은 경교장이 있는 강북삼성병원을 끼고 한양도성을 따라서 딜쿠샤로 향했다. 홍난파 가옥을 지나 오른쪽 사진처럼 생긴 길이 보이면 그대로 직진하자


딜쿠샤는 아직 공사중이었다. 그런데 오른쪽 사진의 딜쿠샤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알고보니 현재 건축 원형이 복원된 모습이다. 복원 전 거주민들이 임의로 구획을 나눠서 살았던 듯 하다


내 기억속 딜쿠샤 2층 외벽이 오른쪽처럼 변했다. 1923년 당시 외벽을 최대한 살리거나 그 벽돌로 재현했다면 좋았을텐데 너무 아쉽다. 가운데 사진이 지붕 복원 공사중인 사진이다
딜쿠샤의 원래 출입구는 왼쪽 사진의 건물 중심에 위치해 있는데, 복원된 딜쿠샤의 출입구는 뜬금 없이 딜쿠샤의 옆구리를 뚫어서 들어오라고 되어 있었다


입장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나는 미리 들어갈 수 없었다.  

안내실에 계신 분께서 방역수칙을 굉장히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타임이 끝날 때마다 환기와 소독을 하여 시민들이 안전하게 관람을 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코로나로 해설은 중단되고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서 들을 수 있는데, 관리자께서 장갑을 끼고 하나하나 오디오 소독을 해서 안심하고 착용할 수 있었다.


딜쿠샤 입장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면 큰 은행나무 뒷편으로 난 파란색 문을 따라 밖으로 나와보자. 그 문을 경계로 갑자기 시골길이 펼쳐지며 한양도성이 나온다


1시 30분에 입구에 있던 슬리퍼를 신고 딜쿠샤에 드디어 입장했다. QR code와 체온을 측정한 후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는데 1시간 동안 관람할 수 있었다. 참고로 오디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다면 1시간의 관람이 빠듯할 수도 있으니, 시간이 없다면 몇 가지는 스킵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오디오는 전부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딜쿠샤의 주인이었던 테일러 부부는 192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4년에 딜쿠샤를 완공하였다. 하지만, 딜쿠샤는 1926년에 벼락을 맞아 화재가 발생해 1930년에 재건되었다.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후 1959년 자유당 조경규 의원이 매입했지만 1963년 그의 재산이 국가로 넘어가면서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그 후로 딜쿠샤는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가 2005년에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가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의 의뢰를 받아 딜쿠샤를 찾아냈다. 2006년 브루스는 66년 만에 자신이 어린 시절에 살던 딜쿠샤를 방문하였고 그렇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테일러 부부는 미국인 사업가 엘버트 테일러와 영국인 연극배우였던 메리 린다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처음 만났다. 앨버트는 메리에게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며 본인의 마음을 전했고, 앨버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인도로 떠나는 메리에게 자신이 꼭 인도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열 달 후 인도에서 재회하였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한국에 입국한 테일러 부부는 처음에는 서대문의 한 한옥 (서대문구 충정로 7길 부근)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1층에는 테일러 부부에 대한 소개와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테일러 부부의 소장품이다. 가운데 사진은 메리의 엄청 큰 옥반지이고, 오른쪽 호박 목걸이가 전시실에서 가장 의미있는 물건이라고 한다

.

테일러 부부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가 있는 넓은 땅을 발견한다. 이곳은 예부터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이었는데 은행나무에 반한 메리는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했다. 메리는 자신들의 집에 딜쿠샤 (기쁜 마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딜쿠샤는 메리가 인도에서 방문했던 러크나우의 궁전이었는데, 언젠가 자신에게도 집에 생긴다면 이 이름을 붙이겠다고 결심했다.


1층 내부와 원래 딜쿠샤 입구에서 바라본 곳이다. 테일러 부부는 벽에 황금빛이 도는 노란색 페인트를 칠했고, 이 거실에서 디너파티나 무도회를 열었다고 한다


딜쿠샤의 1층 거실 벽면은 습한 장마철을 대비해 벽지를 붙이는 대신 페인트를 칠해 꾸몄고, 뒤쪽 벽에는 벽난로를 설치하였다. 계단 옆에는 큰 소리로 째깍거리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거실 전체를 바라보고 있으며, 포치로 나가는 곳은 출입문과 함께 양쪽으로 여는 큰 유리문을 세 개 더 설치하였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이 넓은 거실을 복원 전 여러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임의로 공간을 나눠서 생활한 듯 보였다. 


기묘한 분위기의 2층으로 올라가던 계단마저 사라졌다. 그 계단이 원래 있던 자리로부터 왼쪽으로 이동이 되어 새로운 계단이 생겨났다. 1층과 2층 사이에 있던 쥐가 드나든다던 공용화장실 공간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복원 전 딜쿠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공용화장실이 있었고, 현관문과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었다. 그 당시 40장 정도의 유리창이 전부 없어지고 현재는 흰색 벽으로 변했다


과거 딜쿠샤의 가장 큰 볼거리는 1층과 2층 사이를 연결하던 40장 정도로 장식된 작은 유리창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왜 이런 식으로 복원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복원하기 전에 전문가가 와서 충분히 이곳 사진을 찍고, 고증했을 텐데 이 부분을 없앤 것이 아쉬웠다.


2층에 올라와보니 과거 딜쿠샤와는 다르게 딴 세상에 펼쳐져 있었다. 무서웠던 기억을 잊고 파노라마로 사진 한 장을 찍어봤네


복원 전 내가 벌벌 떨며 복도 처음부터 끝까지 왔다 갔다 했던 딜쿠샤의 2층은 사실 테일러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곳이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과 여가 시간을 즐길 만한 것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더울 때는 대나무 기둥 위로 자라난 등나무 덩굴이 테라스 전체에 그늘을 드리우고, 하늘색으로 칠한 방도 마치 계곡처럼 초록빛이 되었다고 메리가 쓴 책 '호박 목걸이'에 서술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최대한 비슷한 시대의 물건들을 사 오거나 최근에 작업해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지금은 아무리 걸어도 나무 바닥에서 끽끽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사실 이 부분도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 나무 바닥을 살리고 위에 강화유리를 깔았다면 1920년 대 초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뺀질뺀질한 새 나무를 깔아버렸다. 요즘 핫한 종로 카페들이 옛날 집이나 지하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손님들이 볼 수 있게 잘 살리고, 그 재료를 이용하여 건축해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어찌 국가에서 하는 일이 개인 카페보다 더 못하게 됐을까?


2층에는 원목 테이블과 소파가 있고 창문 너머로는 지난 4월에 재개관한 경찰박물관도 있었다. 신경을 엄청 쓴 것 같아 보이니 조만간 저기도 놀러가봐야겠다


방 곳곳에 있던 벽난로이다. 이런식으로 최대한 과거의 모습을 남겨뒀었어야 했다. 그나마 조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앨버트는 소공동에서 테일러 상회를 경영했는데 왼쪽은 그 상회에서 판매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언더우드사 타자기이다. 오른쪽은 메리가 그린 금강산의 모습이다


왼쪽 사진의 인물이 테일러 상회 일을 도왔던 김주사이고 오른쪽이 그의 초상화이다. 왼쪽 사진의 은행나무는 권율 장군이 심었고 지금도 이곳 행촌동을 지키고 있다


1N년 전부터 봐왔던 행촌성곽마을의 환경이 많이 바뀌었음을 보고 느꼈다. 다음번 방문했을 땐 딜쿠샤 앞마당 공사까지 끝나 있었으면 좋겠다


과거 노숙인이 살았던 지하에는 테일러 부부가 장작, 식품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지하를 개방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인지는 모르겠다.


1N 년 전, 나에게 귀신의 집으로 불리던 딜쿠샤는 서양식 건축기법으로 지어졌지만 한국의 환경을 고려하여 건축되었고, 1920~30년대 국내 서양식 집의 건축기법과 생활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현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가 달라서 누구는 힘들게 찾아온 노력에 대비하여 별 볼 일 없는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500년 정도 된 은행나무 옆에서 100년 동안 종로 행촌동에서 기특하게 자리 잡고 있는 딜쿠샤를 선선한 가을 날씨에 산책 겸 방문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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