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간방 박씨 Sep 08. 2021

부사장이라는 직책의 무게

조직생활은 오래할수록 쉽지 않다는걸 느낀다

내가 생각을 비우고 걷고 싶을 때 가는 곳 중에 '서울로'가 있다.

'서울로'는 회현역에서 시작해서 옛 고가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남대문과 서울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아주 멋진 산책코스이다. 번잡한 서울 거리를 신호등이나 인도로 다니는 무례한 배달 오토바이에 방해받지 않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나는 '서울로'에 꽤 자주 가는 편이다.


'서울로'에는 곳곳에 피아노도 있다.

누구나 피아노 옆에 있는 손소독제로 손을 청결히 한 후 피아노를 칠 수 있는데, 내가 갈 때마다 한 할아버지께서 피아노를 치신다. 6세 때부터 관사에서 엄마한테 손등 맞아가면서 체르니 50번까지 피아노를 배운 나는 피아노 소리가 나면 자동적으로 돌아본다. 신기하게도 피아노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전문적으로 피아노를 배운 사람인지 아닌지, 어떤 성격인지를 대강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울로'에 갈 때마다 종종 뵙는 그 할아버지의 피아노 소리는 힘이 있지만 전문적으로 배운 솜씨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보내는 피아노 음색은 곡이 빠르고 경쾌하지만 듣다 보면 슬퍼서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대체 뉘신데 이렇게 사연 있게 피아노를 치실까 하고......


피아노 연주를 더 듣기 위해 걸음을 멈추면, 할아버지는 피아노를 치다 말고 나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할아버지 바로 뒤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매일같이 광고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보다 몇 뼘은 더 떨어진 거리에 몰래 서 있지만, 할아버지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에 불안해 하기 시작한다.


일반인답지 않아 보이는 수상한 행동을 보고 처음에는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드디어 내가 현상수배범을 잡는 건가? 


문득 이 생각이 들자 피아노 너머 바로 길 아래에 있는 남대문 경찰서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 전자발찌 아저씨도 서울역 근처에 승용차를 버리고 달아났으니 또 다른 범죄자도 서울역 부근에 충분히 있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피아노 소리를 뒤로 한채 서울역으로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새馬을 금GO 앞에 붙어있는 수배전단지를 봤지만 '서울로'에서 봤던 할아버지 얼굴은 없었다. 그 후로도 '서울로'를 산책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게 그분의 두툼하고 각진 어깨만 지나가면서 여러 차례 보며 천천히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보며 또 다른 인생 목표도 하나 세웠다.


나는 절대 뒷모습이 슬픈 할머니는 되지 말아야지! 


어른이 될수록 본인의 감정을 숨기는데 능숙해진다지만, 이건 다 거짓말이다. 성인의 뒷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감정과 현재 어떤 상황인지 거의 다 알 수 있다.


부사장님이 큰 고비를 겪은 후로 나는 그분의 뒷모습을 항상 살핀다.

그런데 부사장님도 나를 볼 때마다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꼬치꼬치 물어보신다. 우리는 세대 차이가 엄청나지만 항상 서로를 살피는 사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를 예의 주시했다.

내가 24살이었던 6월의 마지막 금요일에 5명의 면접관 중 유독 한 사람이 계속 나에게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나 역시 '저 사람이 이 회사 사장인가?'라는 생각에 '저 사람만 통과하면 이 회사 면접은 합격하겠다'라고 짐작을 했다. 이 회사에 오기 바로 하루 전에 이미 합격통지를 받은 곳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위기에 위축될 이유가 없었다. 24살의 소리따는 '인사팀에서 면접비를 얼마나 줄까?', '면접 끝나면 2시니까 잠실 가서 놀다 집에 가야겠다'라는 잡생각이 더 많았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 5명이 나를 하찮게 보고 '다음 기회에'라는 통보를 집으로 가는 길에 받기는 죽어도 싫었다. 나는 그때도 최선을 다해서 영어 면접까지 다 봤고, 가족 신상까지 탈탈 털린 후 면접이 끝났다. 부사장님은 면접이 끝날 때쯤 '소리따씨는 전혀 안 떠네요? 어디 합격한 곳 있는데 여기 온 거 아닌가?'라고 살짝 흘겨보며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해서 사원증을 목에 거는 순간부터 부사장님은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 주셨다. 부사장님은 이곳이 소리따씨 인생의 첫 직장인데 '이 회사에 바라는 점 없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셨다. 나는 별생각 없이 다른 회사처럼 꽃바구니를 집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지방에 계시던 부모님께 편지와 꽃바구니가 배달되었다. 나 이후로 회사에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꽃바구니를 부모님께 보내는 전통이 생겼다. 이게 다 내 덕분인데 신입사원들은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부사장님과 만나기로 한 그날, 나는 모처럼 휴가를 냈다.

여유 있게 평일을 즐기기 위해서 약속한 시간보다 두 시간도 더 전에 백화점 라운지에 가서 음료를 받아왔다. 휴일일 때는 커피를 안 마시려고 정말 노력을 해보지만 카페인에 이미 중독된 건지 나의 하루는 커피를 마신 전 후로 시작되는 기분이다. 코로나로 백화점 내에서 음료를 마시지 못했고 테이크아웃만 가능했다. 혼자였지만 이래 봐도 나는 정용진 회장님 백화점의 VIP라 한 사람당 두 잔씩 공짜 음료를 받아올 수 있어서 샷이 추가된 아이스라테와 아이스 녹차를 받아왔다.


커피는 받자마자 맛을 음미하지도 않고 원샷했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정신이 들더라. 커피를 마시고 나면 물을 그만큼 많이 마시라고 해서 녹차도 다 마셨다


시청역 지하에는 고급스럽고 맛있는 빵집이 있다.

호텔 브랜드인데 매달 두 번씩 아빠 카드 찬스로 50% 할인된 가격에 구입도 가능하다. 이번에도 아빠의 힘을 빌려 파운드케이크 두 개를 부사장님 선물로 샀다.

 

개인적으로 조각케이크를 더 좋아하지만 파운드케이크가 명절 선물로 더 정갈해보여서 두 개 구입했다. 포장값 천원 내니까 깔끔하게 선물용으로 만들어 주셨다


부사장님은 항상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오시기 때문에 나도 30분 일찍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평일 저녁 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퇴근하는지 벤치에 앉아서 구경했다. 오늘도 약속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하신 부사장님과 간단히 야외에서 차를 마시려고 했지만 부사장님께서 꼭 식사를 하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식당에 갔다.

 

코로나로 식당에서 밥을 먹은게 꽤 오래전인것 같다. 사무실에서도 항상 샐러드를 배달시켜 먹으니 이렇게 식당에 와도 되나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도 갓 나온 짜장면은 항상 옳다


내가 소사원이었을 땐,

임원들은 나보다 훨씬 더 센 존재인 줄로만 알았다.


우리 회사보다 훨씬 큰 회사에 계시다가 경력직으로 젊은 나이에 임원으로 스카우트되어 들어오셨지만, 내가 대리를 달고 2년 후에 부사장님의 입지는 굉장히 좁아졌다. 항상 따를 것 같았던 밑에 직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주변에 연락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거의 없다고 한다.


회사를 위해 소신껏 입바른 소리만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조직은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다수결의 원칙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몇 가지가 이 회사에 있었고, 결국 부사장님은 타이틀만 가진 채 많은 것을 내려놓으셔야 했다.


많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힘든 생활을 하시다가 결국 신경정신과 치료까지 받으시면서 부사장님은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본인 스스로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다.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에 일어나야 할 그 시간에는 반드시 일어나서 운동을 하신다고 하셨다. 며칠 전 비가 왔을 때도 고어텍스 옷을 입고 비를 맞으면서 1시간 이상 산행을 하셨다.


직설적으로 말씀을 잘하시는 부사장님은 성격도 강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를 만날 때마다 내가 대리가 되기 1년 전 투신자살을 했던 한 직원의 이야기를 꺼내신다. 나 역시 한 때 친하게 지냈던 동료이고,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아있었던 직원이기에 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었다. 그래서 때로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밥을 먹으면서 그 친구 얘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당혹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부사장님 역시 그때 그 사건이 끔찍하셨나 보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받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을 하니 그 친구 팀장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임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18층에서 투신했지만 응급실에서는 그 친구를 살리기 위해 2시간 이상 애를 썼다고 한다. 부사장님은 응급실에서 나오는 여러 의사들이 시뻘건 피를 툴툴 털며 나오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바닥에 그렇게 많은 피는 처음 보셨다고 한다. 장례가 끝나고 그 친구 아버지는 회사를 고소하고 직원들을 경찰 조사받게 만들겠다고 하셔서 특히 가깝게 지내던 내가 겁을 많이 먹었다. 부사장님은 누구보다 사건 해결을 위해 고인이 된 친구의 아버지를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무던히 애를 쓰셨고, 나를 포함한 다른 직원들이 일을 하는데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셨다.


어른이 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당연히 강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애써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그분의 몸과 마음은 그동안 만신창이가 되어 있어서 아직도 회복되어 가는 중이다.


그날 부사장님은 헤어지기 직전까지 나에게 강조하셨다.

요즘 시국에 월급 나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거니 힘들어도 씩씩하게 버티고 잘하라고 다독이셨다. 왠지 지금은 부사장님보다 내가 좀 더 강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부사장님의 뒷모습은 내가 이 회사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임원실에 와서 인사를 정식으로 드리던 그때 그 뒷모습을 가지고 계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다들 잘 지내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