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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Sep 11. 2021

고민

올해도 슬기롭게 극복하기

1년에 꼭 한 번은 심하게 힘들고 만사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회사 생활은 매일이 고비지만, 그 힘듦의 무게가 남다르고, 짜증 나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등 뒤에 꽂히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또 뚫린 주둥이라고 본인들이 왜 그렇게 업무를 했는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해대고, 막내들은 가르쳐 준 업무인데도 아직까지 갈팡질팡해서 나의 퇴근 시간을 늦추는데 한몫들을 하고 있다.


항상 그럴 때마다 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서 어디로든 떠났다.

몇 년 전까지 사람들은 매년 이 맘 때쯤 되면 '이번 여행지는 어디야?'라고 물어댔고 나는 차마 '너네들이 없는 곳으로 갈 거야'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디로라도 갔다 오고 나면 나 스스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평소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고 느낄 땐 목적지를 좀 멀리 잡고 계획을 짜곤 했다.

2017년 추석 땐 연휴 앞 뒤로 휴가를 내서 10일을 콜롬비아 가는 일정으로 잡았다. 짬밥이 많은 나는 쉴 수 있는 날이 많지만 회사에서는 내가 오래 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명절에도 해외 거래처들은 일을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내가 언제 어디서라도 쉽게 연락이 되길 바랐다. 콜롬비아로 가겠다는 휴가계를 제출하자마자 상무님은 본인 방에서 '소대리!!!!' 하고 크게 불렀고, 내가 무표정으로 그의 방에 들어서자 '이러지 마아~~~'라고 투정을 부리는 말투로 소리치더니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땐 그만두라고 하면 알겠다고 하고 짐 싸서 나올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냥 다 힘들고, 여기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얼굴도 보기 싫었다. 그런데 상무님은 하루 뒤에 휴가 승인을 해 주셨고, 미주 지사에 연락을 해서 콜롬비아 거래처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내 카카오톡으로 보냈다. 긴급연락처이니 보고타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이곳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콜롬비아에 가기 바로 전날에는 100불을 넣은 흰 봉투에 '여행 잘 다녀오세요. *** 드림'이라고 써서 나에게 건넸다.


그때 콜롬비아라고 하면 '커피'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고, 여행기를 찾아봐도 콜롬비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냥 회사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여행지에서도 동양인들을 찾기 힘든 곳에서 현실을 다 잊고 발에 티눈이 박히도록 돌아다니겠다고 마음먹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런데 해외로 가는 길은 막혀있다. 2주 전부터 '힘들다. 힘들다'라는 소리가 머릿속에 맴돌고, 이래서는 못 버티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냥 한 달에 백만 원만 더 줘도 버틸만할 텐데...... 인센티브는커녕 4만 원짜리 수제케이크만 손에 쥐어준 채 수고했다고 하니 주말에 케이크를 숟가락으로 퍼 먹으면서도 목에 꽉꽉 막혔다. 어디 멀리 떠나지도 못하고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까 생각하며 며칠을 욕조에 물을 받아서 얼굴만 내놓고 1시간 동안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가 Y랑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평일에 하루 쉬니까 일단 그날을 생각하며 좀 더 버텨보기로 결심했다.


Sorita : 나 요즘 일하기가 너무 힘드네

Y : 돈 버는 것은 쉽지 않은 거 같아요

Sorita : 어. 남의 돈 받는 게 쉽지 않아. 나 요즘 위기야

Y : 오늘 하루도 파이팅합시다!!!

Sorita : 넵!!!!


마침 Y는 만나기 하루 전 그날이 당직이었다.

당직 근무자 앞에서 9시간 근무자가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거 같아 살짝 미안해졌다. 다음 날 오전 11시에 꽃시장에서 보기로 했는데 당직 근무 마치고 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꽃시장은 정오에 문을 닫으니 11 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건데 Y한테 무리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Y랑 만나기로 한 그날,

출근할 때는 절대 못 입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집에서 나와 지하철 역을 향해서 여유롭게 걸어가는데 Y보다 두 살 많은 우리 사무실 막내에게서 카톡이 왔다.


Y보다 두 살 많은 막내 : 과장님, 휴가 중에 죄송합니다! **계약서 필리핀에 제가 보낼까요?

Sorita : 뭔 계약서? 내가 어제 계약서 보내고 퇴근했잖아? 너 CC 넣어서 메일도 보냈으니까 확인해봐

Y보다 두 살 많은 막내 : 아... 죄송합니다. 확인했습니다. 계약서가 아니라 샘플 얘기였습니다. 공장에 얘기해서 제가 사무실에 받아놓을까요?

Sorita : 아니, 그거 QC랑도 확인해야 하니까 내가 다음날 출근해서 할게


2년 가까이 이 사무실에서 버티고 있는 우리 막내도 충분히 힘들 거라는 거 안다.

그런데 막내는 가끔 내 속에 밤고구마를 쑤셔 넣는 경우도 있다. 휴가 때 제발 연락 안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날 퇴근하기 전까지 충분히 얘기하고 카카오톡으로 정리까지 해서 내용을 전달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또 연락이 왔다.


지하철을 환승하고 한강을 건너면서 Y에게 내가 거의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Y는 버스를 바로 앞에서 놓쳐서 좀 늦을 것 같다고, 미안하다며 얼른 가겠다고 답이 왔다. 일하고 몇 시간 전에 퇴근했을 테니 얼마나 피곤할까 싶어서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오라'라고 답을 보냈다. 10시 50분에 도착해서 백화점 구경을 하고 꽃시장에 가서 혼자 구경을 하다 보니 11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이러다가 Y는 꽃 사지도 못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모처럼 평일에 밖에 나와서 꽃구경을 하니 신나서 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찌나 정신이 팔렸는지 코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Y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꽃시장이 문을 닫기까지 20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나는 미리 봐 두었던 꽃을 샀고, Y도 이름 모를 꽃들을 샀다.

각자 꽃을 산 걸 보니 서로의 취향이 참 다르구나 싶었다. 사장님께 친구랑 나눠가지게 1+1로 가격 깎아달라고 해서 꽃을 사서 한 단을 Y에게 선물로 줬다. 일 끝나고 꽃시장은 자주 와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Y는 고속버스터미널 꽃시장이 처음이고 꽃이 너무 싸다며 빠른 걸음으로 구경을 다니고 있었다. 아마 그 장소에 꽃집하는 남자 사장님 빼고는 Y가 유일한 남자였을 거다.


11시 58분에 꽃시장에서 나와서 바로 옆에 있는 백화점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도 VIP 찬스로 커피와 자몽주스를 받아서 옥상정원에서 바람을 쐬며 마셨다. 원래는 반포 한강공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데 이제는 신축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시야가 막혀버렸다.


당직 근무 때 오래 서 있어서 Y는 앉고 싶다고 했다. 옥상에 벤치는 이용불가라 그냥 주변에 깔끔한 곳 찾아서 음료를 마셨다. 백화점 앞에 생기는 아파트는 어마어마하게 비싸겠지?


Y에게 지난번 빌려갔던 책을 되돌려주며 나는 손편지도 같이 건넸다.

얼마 만에 손편지를 써보는 건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은 다 담아서 글을 썼다. Y는 책을 읽은 내 소감을 듣고 싶어 했고, 우리는 그 작가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매사에 덤덤한 태도를 가지는 그는 지금 당장 본인이 죽어도 별로 놀라울 것 같지 않다고 말을 해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Sorita : 무슨 소리야. 죽다니! 건강하게 100살까지 살아야지

Y : 100세 시대라... 건강하게 100살까지 살면 살고 싶은데...... 아프면서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아서요. 앞으로 제가 건강할 수 있는 환경이 안될 거 같아요

Sorita : 넌 자기 관리 잘하고 있잖아. 식단도 관리 잘하고 있으면서 뭘 그래! 우리 회사에 너 정도 몸 좋은 남자 한 명도 없거든? 여기 노인분들 여유롭게 강남에 있는 백화점 와서 좋은 거 드시는 것 봐. 우리도 저렇게 늙어야 해!

Y : 네...... 돈도 많이 벌어야겠네요!


우리는 뭐 먹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백화점 식당가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줄 서 있는 곳을 선택했다.


나는 초밥을 먹고, Y는 회덮밥을 먹었다. 밥 양이 적어보여서 내것 초밥 3개도 먹어보라고 건넸다. 아침은 회사에서 먹고 왔다고 했는데 엄청 잘 먹더라


나와 Y의 공통된 점은 과거에 H에서 몇 년간 살아서 그 지역을 서로 안다는 점과 그릇 그리고 가구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뿐이다. 각자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Y랑 이야기를 하면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보다 어린 친구도 본인이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며 나도 투정 그만 부리고 부정적인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오늘은 폴 바셋에서 차를 마시며 Y가 소속된 곳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참 많이 들었다.

힘이 들긴 해도 그는 지금 이곳이 적성에 맞고 한가한 시간에는 틈틈이 운동을 하고 책도 읽으며 자기 계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언론에서도 이슈화되는 성별 논란에 대해서 그는 솔직하게 본인 의견을 말했다. 나는 Y가 아직 어리고, 신입 직원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그는 학교에 있을 때부터 많은 것을 이미 비판적으로 보고 조직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Sorita : 나도 여자지만 회사에서 일하면서 너랑 비슷하게 생각은 해 사실... 

Y : 그래도 Sorita님은 여기 오셔도 잘하실 거 같아요. 딱 본보기가 되실 거 같아요!

Sorita : 어우 야~ 난 시험부터 통과 못해 ㅋㅋㅋ


백화점 지하 1층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음료를 마시며 한참 얘기를 나눴다. 오른쪽은 내가 오늘 산 꽃인데 전부해서 2만원이다. Y에게 선물한 꽃도 그가 마음에 들어해서 다행이다


일을 할 때 사람들에게 너무 자주 욕을 먹는다고 씁쓸하게 얘기하던 그를 보고 나는 속이 뜨끔했다.

내가 지금까지 쓴 글에 그 조직에 대한 욕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순간적으로 생각해봤다. 회사에서 '4분기도 파이팅하자'라는 레터링 된 수제케이크를 받아도 다 때려치우고 싶고 힘들 때가 많은데, 오히려 도와주러 왔다가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면 도대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CCTV 없는 곳에서 입을 쥐어박을 수도 없잖아?


나는 그동안 Y를 보며 느꼈던 점을 하나 얘기해 줬다.


Sorita : 내가 봤을 땐 넌 목소리 톤도 차분하고, 욱하는 성격이 없어서 **분야로 가면 잘 어울릴 거 같아. 누가 헛소리나 거짓말해도 너는 침착하게 듣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Y : 사실 그쪽에 생각이 있긴 해요

Sorita : 그렇지? 넌 잘할 거야. 내가 아무나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넌 공부 머리가 있으니까 얼른 해봐. 한 2~3년 정도?

Y : 휴직하고서요? ㅎㅎㅎ

Sorita : 그렇지 그렇지. 넌 앞으로 일할 날이 많으니까 그 정도 시간은 충분히 투자해서 전문가로 활동해

Y : 일단 다양하게 생각은 하고 있어요

Sorita : 근데 되고 나서 내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의심하고 분석하는 건 아닌가 몰라. 직업병처럼......

Y : 어휴, 절대 그러진 않죠


나는 오늘 Y가 살아가는 얘기를 듣고 함께 백화점 9층 리빙관에서 쇼핑도 하면서 잡념을 많이 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멋있게 마무리하기 위해 좀 더 힘을 내보기로 했다.


나도 힘들고 그도 힘든데 그래도 어떻게든 우리 둘 다 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순간 위로를 받았다. '삶은 힘든 거야'라는 생각이 2주 넘게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볼 만하다'라고 생각을 60% 정도 전환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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