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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Sep 20. 2021

아직 작별할 시기가 오지 않았다

8권 / 10권 작별하지 않는다

서빙고역에서 내려서 내가 좋아하는 잠수교를 지나 반포한강공원을 걷다 보면 한 사람의 묘지를 볼 수 있다.


화장은 했지만 납골당에 가지 못했고,

대신 한강공원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반포한강공원에 한 소년의 추모 공간이 있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한강에서 죽음을 마주한 것은 딱 3번뿐이었다.

첫 번째가 대학교 3학년 때 서울시에서 주최하던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당시였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여의나루 역에 있는 한강이었다. 그런데 봉사활동 기간이 끝나기 딱 이틀 전에 내가 근무를 해야 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한 시신이 발견됐다.


전날 밤 비가 많이 와서 그날 행사가 취소될까 봐 걱정하면서 5호선을 탔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걱정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일이 생겨서 생각지도 못한 걱정을 하게 된다는 징크스를 가지게 된 것이......

그날은 근무는커녕 빨리 다음 날이 되어 봉사활동 인증서만 받고 다시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올해 봄, 경주로 벚꽃구경 가려고 강변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다가 그 다리에서 119 구급대와 순찰차 여러 대가 모여있는 것을 보고 또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구나 싶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반포한강공원에서 한 소년이 실종 5일 뒤 시신으로 떠올랐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인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현재 그 소년의 아빠는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싸움을 몇 개월 째 하고 있다.

그분은 이제 돌려서 그의 생각을 얘기하지 않는다. 아빠는 삶의 희망도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지금까지 모아뒀던 돈을 사건 초반에 단순 실종되었을 거라 믿었던 자식을 찾고, 그 후 변호사를 선임한 후에 지금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거의 다 썼을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미제 사건이나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건을 주로 다루는 한 프로그램을 상대로 아빠는 잘못된 보도를 정정해 달라고 분명한 사실에 근거하여 요청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서야 그 프로그램은 방송 말미에 고작 '중재 과정을 거쳐 유족과 합의'를 했다는 짧은 보도를 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글을 관심 있게 봤을까? 파급력이 큰 방송을 통해 사람들이 가지게 된 인식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라서 아빠의 노력이 가여울 정도다.


누군가에게는 데이트 장소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조깅 장소로 애용되는 한강공원에 발걸음을 옮기기 누구보다 쉽지 않은 아빠는 며칠 동안 추모 공간에 얼굴을 비췄다. 4월과 5월에 뉴스에서 자주 봤던 아빠의 얼굴과 몸은 몇 개월 사이에 너무도 작아지고 여윈 모습이었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두 달 남짓한 은둔과 근 기아 상태로 상당량의 근육이 소실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편두통과 위경련, 카페인 함량이 높은 진통제 복용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먹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노력해보기 전에 폭염이 시작되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청와대 국민청원 52만 명에 이어 국회 청원이 10만 명을 달성했다.

국내외로 정말 많은 분들이 지금까지 관심을 갖고 재수사를 촉구하는 것을 보면 죽은 소년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그의 죽음은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소년과 '작별하지 않겠다'라는 사회 구성원들의 강한 의지가 아닐까?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아직 주전자의 부리에서 김이 솟지 않았다. 비등점을 넘어서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흰 실타래 같은 증기가 주전자 부리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맞물렸던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반쯤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이 사건을 처음부터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아빠가 단순히 아들의 죽음에 대해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아빠는 지금까지의 다른 희생자 가족과 다르게 일목요연하고 냉철하게 사건을 조목조목 분석하고 반박해왔다. 아빠라는 한 개인이 어마어마하게 큰 조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있어서 올해 5월까지만 해도 많은 시민들 역시 공권력의 명확한 대답을 듣기 바랐다. 하지만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된 답변을 지금까지 듣지 못했다.


택시기사 폭행 사건이나 한 국회의원 아들의 반복적인 음주운전 사건만 봐도 우리는 이 사회에 대해 실망감을 느낀다. 우리가 사회의 공정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지점이다. 힘 있는 자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추상적이고 두리뭉실하게 변해가는 공권력을 보며 사람들은 그 조직에 대해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만약 내 인생에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 나와 내 가족에게 터졌다면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라고 맹목적으로 믿고 기다리기보다는 '반드시 상대방보다 더 힘 있고 배경이 좋은 변호사를 먼저 선임해야 한다'라는 교훈 아닌 교훈도 아빠는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아무리 일선에서 몸이 부서져라 밤낮으로 일을 한다 해도 이런 사건들이 크게 터질 때마다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도루묵이다. 올해 상반기에 방구석에 처박힌 나를 포함한 수많은 코난들이 공권력에 엄청난 불신과 손가락질을 한 것도 그 이유였다. 국회 청원이 10만 명을 달성한 지금으로서도 공개 재수사를 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청원에 동참한 10만 명 이외에 여전히 그 사건에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국민들 역시 그들이 어떻게 대처할지 앞으로도 지켜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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