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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Oct 09. 2020

나에게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이번엔 네가 나 우산 좀 씌워줘야겠다

S : 너 나랑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Y : 흠......

S : 그 날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이었어. 건물 밖에서 네가 부러진 일회용 우산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더라고.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왔어. 너는 비에 홀딱 젖은 채로 부러진 철사에 오른손을 다쳐서 표정이 좋지 않았지

Y : 아 기억나요

S : 내가 너한테 우산이라도 사주려고 했는데 그 날따라 우산 파는 곳이 안 보이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네 목적지까지 우산 같이 쓰고 가자고 했잖아. 어딘지 몰라도 데려다주겠다고. 근데 너는 나보다 키가 15cm나 큰데도 내 우산을 들겠다고도 안 했어. 그때 진짜 팔 빠지는 줄 알았거든. 계속 걷다 보니 짜증도 나더라고. 너한테 한마디 할까 싶다가도 우산 속에서 네가 자꾸 나한테서 도망가서 우리는 서로 한쪽 어깨가 흠뻑 젖었잖아. 물 웅덩이 있는데도 네가 앞만 보고 가서 나까지 신발 다 젖고......

Y : 아 ㅋㅋㅋㅋㅋ 그랬었나요


시간 참 빠르다.

너랑 이렇게 지금까지 알고 지내게 될지 상상도 못 했어.

올해 초는 나한테 최악의 날이었어. 작년에 우려했던 일들이 나한테 현실로 다가왔는데 그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최악의 상황인 거야. 월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일단 앞에 보이는 일은 하면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유독 그 날은 그게 안되더라고. 하필 그 날이 내 생일이었어. 회사 동료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뜯어보지도 않고 한 구석에 몰아놓고 일을 하는데 도저히 부아가 나서 퇴근 시간까지 일을 못 끝내겠더라고. 그때 마침 네가 보낸 딱 너다운 생일 선물이 도착했어. 예상치 못한 선물에 웃음이 나더라. 네 덕분에 남은 근무 시간 동안 화를 삭이고 일도 잘 끝낼 수 있었어.


네가 생일날만큼은 행복하게 보내야 한다고 메시지도 보내서......


네 덕분에 꾹 참고 며칠 더 버티니까 생각지도 않게 비즈니스 석으로 출장 갈 일도 생기더라. 출장 당일에 너는 밤에 일하는데 나는 속도 없이 비즈니스 석 인증샷을 마구 찍어서 너한테 자랑삼아 보냈지. 그때도 너는 잘 다녀오라고 따뜻하게 얘기를 해줬어. 이럴 때 보면 철듦은 나이와 상관없나 봐.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따뜻하게 말을 할 줄 아는 건 천성이고 이런 건 인간이 타고나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


11년 차인데도 빠르게 변화하는 조직 문화에 입 다물어야 할 때가 수시로 있고, 궁금해도 묻지도 말고 따라야 할 일들이 참 많아. 유독 그게 심했던 게 올해였어. 내가 힘들 때 너는 신입이라 더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연락을 하면 너는 항상 그랬지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새로운 인생을 사는 느낌이랄까......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Sorita님 덕분에 지금은 더 좋게 자리 잡았네요

 

한여름에 코엑스에서 만난 후로 금방 또 보자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만나는 게 쉽지 않았지. 조만간 한번 보자는 네 카톡에 나는 날짜를 확정해 주지 못했어. 사실 마스크 제대로 착용 안 하고 다니는 여러 사람들을 접하는 너를 내가 만나는 게 조금 껄끄러웠거든. 내 마음도 모르고 너는 내가 가보고 싶은 장소에 같이 가자고 했지. 어딜 가야 잘 갔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을 하다가 우울할 때마다 책을 보며 기운을 내는 너랑 같이 김소영 아나운서 책방에 가고 싶었어.


Y : 전 김소영 아나운서랑 오상진 아나운서 둘 다 두 번 정도 봤어요. 운이 좋았죠! ㅋㅋ

S : 와 좋겠다! 둘 다 선남선녀라면서?

Y : 네, 역시 연예인은 다르더라고요ㅎㅎ오상진 아나운서가 은근 허당이래요 ㅋㅋ

S : 허당이어도 그런 허당이면 어서옵쇼지 뭐!

Y : ㅋㅋㅋㅋㅋㅋ

Y : 흠, 잘생기긴 했더라고요


내가 힘들 때 너도 힘들면 같이 위로하면서 버틸 수 있을까 싶었는데 너는 참 잘 헤쳐나가더라고. 사회생활 경험이나 나이를 따져도 내가 네 안부를 묻고 챙겨주고 싶은데 이제는 네가 먼저 내가 별 일 없는지 물어봐주는 게 아직도 적응이 안되고 있어. 지금까지 이 세상은 성악설에 더 가깝다고 믿고 살면서도 한편으로 너를 보면 내 믿음이 가끔 흔들리기도 해. 그냥 심심해서 보내는 카톡이나, 뉴스를 보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단순한 메시지에도 너는 항상 꼼꼼하게 대답해 주는 게 늘 고마워. 솔직히 가려운 곳이 속 시원하게 긁어지는 느낌은 아니어도 네가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 주는 게 은근히 감동이거든. 나한테서 좋은 영향력을 받아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매번 말하는 네가 나한테는 오히려 슈퍼맨 같아. 그러고 보니 너는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슈퍼맨 같은 존재겠지.


우리는 한 달 전에 또 약속을 잡았어. 너나 나나 달력에 계획을 미리미리 세워두는 걸 좋아하니까 약속 미리 잡는 건 누구보다 잘 통하더라. 드디어 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김소영 아나운서의 책방에서 너를 보겠네. 나의 치명적인 기억력 때문에 네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막상 가면 알아보겠지 뭐.


Y : 1시쯤 만날까요??
Y :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시작해요!! ㅋㅋ

S :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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