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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Oct 10. 2020

해외사업부 입성기

해외여행 안 다녀왔다고 하니 해외사업부 들어오기 참 어렵더라......

H에 살았던 7세부터 관사에서 엄마한테 영어를 배웠다. 그 당시 H에서는 중학생이 돼야 알파벳을 배웠고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학교 밖에 없었다. 지금도 H에는 서울의 그 흔하디 흔한 영어 학원이 별로 없다. 엄마는 오빠 영어 학습을 위해서 영어 교재와 테이프를 사서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오빠 책상 바로 옆에 밥상을 하나 더 놓고 아빠가 회사에서 복사를 해가지고 오신 흑백 교재를 가지고 나도 덩달아서 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I로 이사를 와서 엄마는 웬만한 시장은 걸어 다니셨다. 시장 가던 길에 그때 당시 I에서 가장 큰 영어학원을 보시고는 그 학원 전단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오셨다. 나는 우리 집 가정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 정확하게 잘 몰랐다. 확실한 것은 외갓집에서 우리 집이 가장 못 산다는 것뿐이었다. 엄마 지갑 속에는 항상 만 원짜리 3장이 있었다. 엄마는 지갑 속 지폐의 3배나 더 되는 비용을 매달 들여서 나만 영어 학원에 보냈다.


학원 원장은 오랫동안 무역업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학원은 I에서 유일하게 원어민 선생님이 가장 많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level test를 봐야 했다. level test 당일 점심에 나는 오빠와 크게 싸웠다. 처음으로 오빠한테 얼굴을 맞고 입고 있던 원피스가 흠뻑 젖을 정도로 코피를 흘렸다. '내 몸속에 피가 이렇게나 많이 있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내 눈으로 보니 아픈 것보다 죽을까 봐 겁이 참 많이 났다. 엄마가 평소 아껴 쓰라고 신신당부하던 미용티슈 두 통을 다 비우고도 코피가 멈추지 않아서 나는 누워버렸다. 울다 지쳐서 자고 일어나 보니 코가 엄청나게 부어 있었고 코 주변엔 피딱지가 잔뜩 앉아 있었다.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를 보니 쌍꺼풀마저 없어져서 내 눈 크기가 반절이 됐다. 얼굴이 너무 부어서 밖에 어떻게 나가냐고 걱정하던 엄마는 내 얼굴을 씻기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주셨다. 아빠가 퇴근했을 때 오빠랑 내가 싸운 것을 모르게 하려고 엄마는 내 피 묻은 원피스를 손빨래하고 휴지통도 전부 비웠다. 그 바람에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엄마는 거의 뛰다시피 내 손을 잡고 학원으로 향했다. 코가 바람에만 스쳐도 통증이 있었지만 나는 난생처음 보는 원어민 앞에서 긴장을 많이 하느라고 코가 아픈 줄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level test를 보고 중급반에 등록을 했다.


중급반에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많았다. 그때도 나는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관사에서 친구 없이 지내던 나는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학원 건너편의 한 슈퍼마켓에서 매일같이 라면을 훔쳐오는 친구들이 있었고, 여자아이의 신체를 움켜쥐고 대놓고 놀리는 또 다른 두 명의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학원이 좋았다. 단어 시험이나 듣기 시험을 봐서 만점을 받으면 선생님이 스티커를 하나씩 주셨고 월 말에 스티커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에게 학용품을 선물로 주셨다. 썩 마음에 드는 학용품이 아니어도 매 달 내가 그 학용품을 받아서 집에 돌아올 때마다 기뻐하는 엄마의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시험을 잘 보니 나에게 함부로 하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 과목은 나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교 4학년 때 취업 면접을 보며 면접관들은 나에게 왜 어학연수의 경험이 없는지를 대놓고 물었다. 지금보다 훨씬 쿠크다스 멘탈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상처를 참 많이 받았다. 게다가 요즘 같은 때 토익이 만점이 아니면 취업이 어려운데 왜 이 정도의 점수를 적었냐고 무례하게 질문하는 용산에 위치한 한 회사 사장님께 나 역시도 참 건방지게 대답하고 나왔다.


토익 만점이 아니어도 사장님 토익 점수보다는 지금 제 토익 점수가 높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어 회화도 제가 더 잘할 것 같은데요?


이따위 회사는 곧 적자로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래도 어른이니 인사를 깍듯이 하고 나오는데 사장님은 직접 봉투를 들고 회사 1층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면접 보느라 수고했다며 생각지도 않게 면접비를 꽤 많이 주셨다. 해외 경험이 없는 것을 매번 꼬투리 삼던 수많은 회사들을 경험하며 나는 차츰 마케팅이나 내수 쪽으로 취업 원서를 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돌고 돌아서 결국 나는 해외사업부에 입사를 하게 됐다.


대단할 것 같았던 해외 연수나 해외여행은 막상 나가보니 별다른 게 없었다. 그래도 나는 엄마와 해외여행을 같이 나갈 때마다 나에게 처음으로 영어를 가르쳐준 엄마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고 있다.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아서 창 밖을 쳐다보는 엄마께 나는 매번 이런 농담을 한다.


그때 없는 살림에 나 영어학원 보낸 게 엄마 노후 때 여행 가이드하라는 속셈이었던 거죠?


부서 내에서도 중국, 독일, 호주, 인도네시아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입사한 직원들이 있다. 그 직원들에 비하면 한국에서 조촐하게 (우리 엄마는 최선을 다해서 교육을 시켰겠지만) 공부한 나로서는 이 부서에 들어온 게 가끔은 신기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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