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7살이었을 때 할머니는 내가 살던 관사로 보기 드문 인형과 외국 과자들을 소포로 잔뜩 보내주셨다. 우리 집에 이런 선물을 보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공무원은 돈을 못 버는 직업인 줄 알았다.
18평의 관사에서 살면서 엄마는 허리띠를 잔뜩 졸라맸다. 나는 돈이 없으면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다. 20살에 서울에 와서 L호텔 사우나에 갔을 때, 강남 부유층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녀 돈 관리 교육을 한다고 어깨너머로 들었던 적이 있다. 과연 그들의 경제 교육이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는 몸소 나에게 보여주셨다.
돈이 없으면 쓰지 마라. 절대 빚지고 살지 마라. 할부를 해서라도 물건을 살 거면 애초에 그 물건에 욕심을 내지 마라. 모든 것은 일시불이어야 한다. 돈이 없는 사랑만으로 결혼 생활은 유지되기 어렵다 등등
그런데 고모할머니의 남편이었던 고모할아버지는 공무원이라고 불리는 데도 불구하고 돈이 많았다.
고모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관사에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타고 오신 외제차가 관사 안에 진입조차 불가해서 기사가 후진으로 다시 차를 빼는 소동이 있었다. 아빠와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저녁 먹다 말고 밖으로 나와서 본인들의 차를 이동시키고, 내 또래 친구들이 고모할머니 차를 구경했던 것이 꽤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7살도 안된 꼬마도 '돈'의 힘을 다 알고 있었다.
고모할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을 때의 일화를 여기다가 적지는 않겠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모할머니는 집도 차도 없이 관사에서 살던 우리 엄마에게 도움을 종종 요청했고, 보답으로 우리 집에 크고 작은 선물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몇 달 전, 연세가 많으신 고모할머니는 이번에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셨다.
솔직히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코로나로 비대면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게 할머니께 도움을 드릴 수 있었다. 인터넷에 서투르신 할머니를 위해 퇴근 후 간단히 등록 작업까지 마쳐 드렸다. 이것이 나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지만 할머니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할머니는 보답으로 나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셨다.
전날 비바람이 불어서 일부러 강남역을 피해서 퇴근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매우 맑았다. 다들 이런 카페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걸까? 시원한 카페에서 라떼를 마셨다
이런 데서 파는 빵은 비싸기만 할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빵값은 비싼데 맛이 좋았다. 엄마를 위해 빵을 사 가고 싶었는데 작은 밤식빵이 7,500원이다
거미도 먹고 살겠다고 막 붙은 하루살이를 거미줄로 칭칭 감고 있더라. 카페는 나름 프랑스 식으로 꾸미려고 애를 많이 썼다
요즘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지 서울을 벗어나서 콧바람을 쐬니까 기분이 좋았다. 올해 그렇게 빡세게 산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지쳤을까?
대형 까마귀 한 마리랑 눈이 마주쳤다. 너도 뙤약볕에 참 덥겠다
할머니랑 어렸을 때 이야기를 많이 하고 카페에서 3시간 정도 쉬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7세 때의 내가 바라보던 고모할머니의 위상은 지금도 남아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금을 잘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 버는 것 이상으로 더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고모할머니 기억 속에 내 모습은 어떠할까?
내가 7세 때 우리 엄마는 고모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관사에 오시기 며칠 전부터 집 청소를 하셨고,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이불을 꺼내서 두 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셨다. 하지만 18평이었던 우리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분들은 차를 타고 좀 더 이동하셔서 관광지 근처 숙소에서 주무셨다. 그랬던 우리가 지금은 서울에서 할머니보다 더 넓은 평수의 새 집에서 살고 있고, 나도 꾸준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할머니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한가 보다.
내가 10세가 되어 마산에서 고모할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나란히 서서 사진 딱 한 장을 찍었다.
말수도 없고, 올블랙으로 차려입은 고모할아버지가 나는 절대 편하지 않았다. 지금은 현충원에 계신 할아버지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친인척들에게 듣는 할아버지의 인생 또한 참 복잡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