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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교양 있고 우아하게 다니려고 했는데

내 지갑과 신분증은 소중하니까

by 문간방 박씨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어서 미술대회에서 상을 잘 타 왔다.


초등학교 때 소방서에서 주관한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서도 1등을 해서 학교로 상장과 선물이 왔다. 그런데 그때 담임선생님이 상장만 나에게 주고 선물은 본인이 뜯어서 가졌다. 로고가 새겨진 작은 탁상시계라서 탐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12년 인생에 첫 절도범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절도범을 가장한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내 시계를 가로챘다. 한동안 그 탁상시계는 선생님 책상 위에 있었다.


요즘 같으면 학생들이 이런 것도 신고하려나?


지금 생각해도 분한데 어렸던 나는 황당하고 억울해서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 일렀다. 하지만 엄마는 선생님이 필요하니까 가져가신 거라며 나를 오히려 타일렀다. 엄마가 똑같은 시계를 사준다고 하셨지만 엄마는 시계를 안 사주셨고 담임은 한쪽 부분이 금이 가서 이제는 중고가 된 내 탁상시계를 몇 달 뒤에 나에게 돌려주셨다. 그 시계는 고등학교 졸업한 후 서울에 올라오기 직전까지 내 책상 위에 있었다.


중학교 때도 미술 시간이 가장 좋았다. 고등학교 때는 처음으로 유화를 배우면서 머릿속이 온통 유화로 가득 차 있었다. 모의고사를 보고 나서도 남는 시간에는 미술실에 가서 혼자 유화를 그렸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너 정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는 아빠의 직설적인 조언에 나는 꿈을 접었다. 내 꿈은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거였다.


누구나 파리에 한 번쯤은 가 봤다고 해서 나도 대학생이 되면 제일 먼저 파리에 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파리에 대한 내 꿈은 취업을 하고 나서도 3년 후에 이루어졌다. 회사에 다니면서 도피성 여행으로 제일 먼저 파리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휴가를 내기 힘든 직장인의 현실 속에서도 최대한 싼 가격과 경유 시간이 길지 않은 비행기표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파리 대신 로마로 가는 비행기표를 왕복 80만 원에 구입했다. 첫 유럽여행이었던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하필 파리를 경유해야 했다. 새벽 1시에 파리에서 로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혹시라도 에펠탑이 보이지 않을까 목을 빼고 밖을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2012년 9월 30일에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파리에 왔다. 물랑루즈 건너편 자그마한 한 호텔에 묵었는데 카운터에 앉아있던 금발의 미소년이 방 키를 내주며 내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 순간 온 신경이 내 손등으로 집중됐고 나는 온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로맨틱한 곳이었다.


5박 6일간의 짧은 일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매우 타이트하게 계획을 짰다. 꿈에 그리던 베르사유에서 하루를 잡고 몽생미셸에서 또 하루를 잡았기 때문에 파리에만 있는 시간은 고작 3일뿐이었다.


파리에서의 첫날 나는 벼룩시장과 묘지를 둘러보고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왔다. 토끼굴 같고 영화에서나 보던 긴 꼬리를 가진 시궁창 쥐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던 파리 지하철역이었다. 관광객들과 현지인들로 북적였던 지하철 역 안에서 나는 내가 꿈에 그리던 모네의 수련을 본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그런데 지하철 문이 열리고 한 발짝을 내딛는 그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백팩의 무게가 미세하게 변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멈칫하는 순간 내가 타려고 했던 지하철 문은 닫혔고 내 백팩의 지퍼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뒤를 돌아보니 토끼굴보다 더 지저분한 출구가 3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순간 3개의 출구 중에서 맨 오른쪽 출구를 선택해서 뛰어올라갔다. 왜 하필 맨 오른쪽 출구를 택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계단을 다 올라갔더니 내 눈앞에 세 명의 곱슬머리 여자애들이 보였고 나도 모르게 "Hey"라고 외쳤다. 순간 외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라는 후회를 가득 안고 3명을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몰래 가서 잡았더라도 그 여자애들이 발뺌을 했다면 나는 뻘쭘하게 미안하다고 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세 명의 계집애들이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쏜살같이 도망치니 나는 그들이 도둑이라는 걸 확신했다. 나는 도와달라고 애타게 외쳤고 상황을 눈치챈 착한 파리 시민들이 들고 가던 책과 긴 다리로 그 세 명의 길을 막아줬다. 그리고 난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갈 길을 갔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 명 중 가운데 여자애의 곱슬머리와 뒷덜미를 움켜잡았고 순간 그 애는 나를 매섭게 쏘아봤다. 평생 사랑이라고는 못 받아본 듯한 얼굴에 어린 나이답지 않은 험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나는 쫄지 않았다. 나는 내 지갑을 내놓으라고 좋게 얘기를 했다. 그 여자애는 "oops"하더니 보라고! 네 지갑 지금 네 발 밑에 떨어져 있다고, 내가 가져간 거 아니라고 또박또박 영어로 얘기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길에서 생활하는 그 소녀는 내가 파리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영어를 잘하는 아이였다. 순간 아래를 보니 정말 내 지갑이 내 발밑에 있었다.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그 세 명은 내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려고 했고 나는 이제 지갑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에 대해 짜증이 확 밀려 올라왔다.


내가 꿈꾸던 파리에서의 내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딘지 모르는 지하철 역 한 곳에서 언제 빨았는지 모를 옷과 머리는 제대로 감고 다니는지 모를 계집애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고 있는 황당한 상황 속 주인공이었다. 지갑에는 현금 20만 원뿐이었지만 내가 지갑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회사에서 받은 신분증 때문이었다. 그 신분증은 한국과 협약된 모든 국가에 무비자로 방문을 할 수가 있고 수속도 빨리 마칠 수 있는 카드였다.


우리는 도둑이 아니고 네 지갑은 바닥에 있는데 너 지금 나한테 뭐 하는 거냐 라고 매섭게 쏘아붙이는 그 계집애를 나는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뚫린 주둥이라고 본인보다 나이도 많은 나에게 따박따박 대드는 그 순간 나는 큰 깨달음도 얻었다.


회사에서 겪었던 몇몇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은 지금 내가 얘네한테 느끼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지긋이 그 곱슬머리 계집애의 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 씨... 진짜 죽여버릴까...


어느새 내 오른손에는 지나가던 파리 시민이 주워준 지갑이 들려 있었고, 나는 이 지갑으로 그 애를 때릴 기세로 한 손을 높게 쳐들고 있었다. 당황하면 소리도 못 지르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일반적인 동양 여자가 아니라고 판단을 했는지 세 명의 계집애들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여서 sorry sorry를 연신 외쳤다. 하지만 내 지갑을 주워준 파리 노부부는 이 아이들은 파리 시민이 아니다! 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며 경찰을 불렀다. 경찰이 오기 전에 지하철을 순찰하는 3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몇 분 뒤에 왔고, 뒤이어 경찰 3명이 왔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판이 커졌지만 나와 비슷한 한국 여성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얘네는 무조건 경찰한테 넘겨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게다가 내 옆의 노부부는 내가 경찰서에 간다면 본인들이 나서서 통역을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노부부에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경찰에게 물어봐 달라고 하자 뒤이은 통역으로 3시간이 걸린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진술할 것도 많지도 않은데 내 황금 같은 3시간을 타국의 경찰서에서 소매치기 세 명과 마주 보는 일로 허비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런 잡범들 때문에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은 못 보게 된다면 평생 걔네를 원망했을 거다.


1시간을 지하철 역 안에서 소비하고 기력이 빠진 채로 오랑주리 미술관에 무사히 도착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모네의 수련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책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근사했지만, 내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로는 분노를 모네의 작품도 쉽사리 가라앉혀주질 못했다. 차분하게 모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한국에서의 고된 삶도 잊고, 교양을 쌓고 싶었는데 파리에서도 모든 일정과 계획도 내 마음 같지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오랑주리 미술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래서 파리에 다시 가서 모네의 수련을 봐야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그 사건 이후로 단 한 번도 백팩을 메고 여행을 다닌 적은 없다. 심지어 한국에 돌아와서도 백팩 안에는 책만 넣고 지갑은 따로 가지고 다니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그 길거리 소녀들은 오늘 밤도 누굴 타깃으로 헤매고 있을까? 역병이 파리까지 퍼졌다고 하는데 이 참에 근신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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