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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록 Dec 13. 2023

다정하고 성실한 아이디어 양식장 운영자가 될 것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글을 쓴다는 것


1. 갓 태어난 초안은 볼품이 없다


완벽이란 존재할 수 없다. 완벽하고자 하면 시작이 없으니까.


나는 오랫동안 완벽이라는 강박에 시달려왔다.

글 또한 완벽하기를 바랐지만, 미천한 스스로의 작문 실력을 자각을 만큼의 양심은 있었다.


다만, 완벽하진 못해도 완전해야 했다.

이상한 감탄사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문맥도 없는, 멀쩡한 글이어야 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초안은 너무 쭈글 했고, 볼품없었고, 유치했다.


이따위 수준의 글. 

우연히라도 초안을 본 사람이라면 쫓아가 팔목을 붙들고 '사실은 말이죠' 하며 구구절절 해명하고

끝내 벌컥 화를 내어 무례한 인간으로 몰아세우고 싶을 정도였다.



2. 방치되어 썩어버린 생각들


그래서 글쓰기란 곧 엄호였다. 


뒤에서 누군가 의식 없이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진 않은지 두리번거리고 밝기를 낮추고 글씨를 줄이는 일들이 엄호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온갖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깊어진 성체를 낳기를 바라다니. 


유치한 초안 없이 완성된 글을 내놓겠다는 다짐은 그런 것이었다.


하찮고 흔한 아이디어라도 일단 뱉어야 수정의 기회가 주어진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어르고 달래 봐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동안 꺼내달라 퍼덕거리는 생각들을 방치했다.

먹지도 못해 생명을 다한 생각들은 결국 어두운 심해로 가라앉았다.  

뭍에는 파도에 떠밀려 나온 사체로 산을 이루었다.   

힘이 없어진 생각들을 먹고 몸집을 키운 생각들도 얼마 되지 않아 심해로 가라앉았다.

육지에도 바다에도 온통 지독한 악취로 가득했다.




3. 가득 찬 양식장


이곳에 와서는 먼바다로 나가 그 아이디어들을 하나씩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흔하고 못나고 볼품없어도 일단 잡아다 두었다.


갓 태어난 치어들까지도 양식장에 옮겨 두었다가

온전한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도록 잘 먹이고 재우고 돌보았다.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고 가벼웠다. 

넘치는 아이디어들을 다 잡아 돌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악취는 사라졌고 양식장은 늘 가득 차있었다.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외로움, 어떤 의미로는 자유였다.

낯선 언어를 구사하는 이방인은 가벼워지는 것이구나

이렇게나 자유로워지는 것이구나




4. 다정하고 성실한 양식장 운영자가 될 것


확신한다.

나는 다시 유치한 초안들을 감추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으로 돌아갈 것이다.

구석자리를, 사람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헤맬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더 확신컨대

이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잡는 방법을 배웠으니 

바닥에 썩은 물고기들이 수북이 쌓이는 일은 없다.

잘 키우기 위한 방법을 터득했으니

양식장이 비는 일도 없다.


못생기고 작고 볼품없는 물고기들을 

이전보다 덜 부끄러워하고 

이전보다 더 소중히 대할 뿐이다.








*직접 제작한 그림을 삽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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