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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May 01. 2017

미친 바람

바람이 불기 전에 태평양 건너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했던가.


지난 봄 단술을 나눠마시던 후배가 봉투를 하나 건넸다.

 "뭐야?" "선배 드릴려고 가져왔어요." 언뜻 보니 봉투며 포장이 예사롭지 않다. 향수였다. 유명한 상표의 향수가 아니라, 독특한 스토리가 담겨있는 작품과도 같은 그런 향수였다.

후배가 직업상 받은 선물을 나를 기억하고 간직해두었다가 건네준 것이다.

같은 직종에 있었기 때문에 그 선물이 나에게 어떤 부담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받은 것 중에 아무거나 하나 갖다준 것도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받은 선물 중에서도 특별한 것을 자신이 쓰지 않고, 아껴두었다가 나를 생각해서 가져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맙게 받을 수도 있었지만, 아마도 열등감이거나 좋은 물건에 취해 넘어갈 수 있는 나의 나약한 고급 취향을 경계하는 마음 때문에 나는 그 선물을 받을 수가 없었다. "어머 고마워. 근데 좋은 것 같은데 네가 쓰지." 라고 애매하게 거절했다. 다정한 후배는 "선배에게 어울릴 거에요." 하곤 다시 내 품에 떠넘겼다. 어떤 말로 거절해야 좋을지 몰랐던 나는 그애 차에 봉투를 슬쩍 놓고 내렸다.

좋은 것을 거절하기란 힘든 법이다. 그건 그 물건과 그 마음 모두에 해당된다.


봄이 지나고 여름을 건너 가을이 왔다. 가을밤, 우리는 쓴술을 마시러 다시 만났다. 함께 무진장 안주와 술을 마시고는 헤어지는 길에 그녀가 다시 그 봉투를 내밀었다. "선배, 그때 제 차에 이걸 두고 내리셨드라구요." 아, 그녀와 나는 일년에 두 번 만나기도 힘든 사이다. 그 긴 간격을 이어주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거절하지 못한 나는 그 봉투를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가을밤은 조용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내일이면, 나는 25년만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했다.


얼큰하게 취한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향수를 꺼내 포장지를 뜯고, 병을 꺼냈다.

섬세한 주름장식과도 같은 향수 병에는 작은 펜던트가 달려있다.

 'vent de folie'.

이게 무슨 일인가.

광기의 바람. 미친 바람.


이미 예고된 바람.

바다 건너 어디선가 날개짓이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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