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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Mar 15. 2019

몸 이야기

90년대때 유식해지고 싶어서 읽었던 서구(주로 프랑스)의 철학자들의 책에서 자주 접하던 개념이 바로 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 격동기였던 우리 나라에서는 몸이나 성처럼 개인 영역에서 출발하는 철학은 아직도 거대 담론에 한참 밀려있었다.

또 그러한 철학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에 대한 섬세한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일원인 나에게 몸은 뭐랄까? 아직 있지만 있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인간은 너무도 정신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그 똑똑한 인간들이 난해한 언어로 이야기한 몸을 둘러싼 권력과 미묘한 정치 구조를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예를 들어, '젊은 육체는 권력이다' 이런 문구가 동의없이 막 튀어나오는데,  나에겐 낯설기 짝이 없어 한참을 맴돌았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몸을 던져 불꽃이 되던(문자그대로!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투신하는) 시대였다.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버스를 타도 노인들에게 바로 자리를 양보하려고 학생들이 탁탁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젊음이 권력이라고? 내가 볼 때 젊음은 아무 힘이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의 인과를 찾아 설명할 길은 없지만,

이제는 바야흐로 젊은 육체가 권력인 듯한 시대이다.

방부제 미모의 연예인들이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몸을 전시하기 위해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스타를 다시 깔았는데, 날이면 날마다 자기 몸을 찍어 올리는 다이어트 전사들이 실시간으로 나를 방문한다.

처음 인스타 입문 시기에 운동 동영상을 올리던 사람들을 팔로우했던 거 같은데

그들이 이미 대단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고,

매시간 그들의 탐스러운 몸을 찍어올리고 있다.

이것을 어떤 현상으로 보면 재미있지만

당사자의 내면을 생각해보면 좀 처참해진다.

그리고 그들에게 투사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움직임들을 보면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동안 바보상자였던 TV정도에 투사했던 해결되지 않은 욕망과 정서들이

접촉이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것처럼(답글을 다는!) 생각되는 어떤 대상을 통해

실시간으로  자아상의 흠집과 그림자 부분을 자극하고 채워주고 있다.


인간에게 몸은 절대적이다.

자기감의 기초이며, 한번 주워진 몸은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한다.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수용하고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몸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내 삶은 어디론가 빠져나간다.


부당한 대우 앞에서 내 근육에 힘이 들어갈 때 느끼는 자신감이나,

등이 바닥에 부침개처럼 붙을 때 느끼는 평화로움,

장이 편안해서 상대눈을 오래 보고 있어도 동요되지 않는 하나된 느낌,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재미있어 정처없이 걸어다닐 때의 기분은

타인의 관찰에 집중할 때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나를 둘러싼 미세하고 짜릿한 감각과 기쁨은

오로지 나의 것이며 삶의 기쁨은 거의 대부분 내 안에서 나온다.


물론 아름다움 몸 앞에 찬탄하기도 한다.

비상하는 발레리노의 그림처럼 휘어진 몸의 각도,

모든 근육이 하나의 완성을 위해 폭발하는 양감을 이룰 때

아름다움에 전율한다.  

똑같이 몸을 통해 보여주지만

발레리노가 완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나의 관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부, 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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