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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Jul 28. 2020

뭐하러 상담을, 점집이나 가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심리상담을 찾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심리적 케어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선뜻 상담소를 가지 못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이 기존의 상식이나 신념들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하면 된다'라고 외친 한 독재자의 정신은 거의 한 세대를 성공에 취하게 한 마법같은 문구였는데

그 바닥에는 인간의 마음이 하염없이 단단한 것이라 강하게 다룰 수록 더 단단해진다는 설정을 깔고 있다.  

그래서 윗세대는 마음이 힘들다고 말하는 젊은이에게 굳은 의지를 가지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말한다.

그 세대가 평생을 바쳐 마련해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결과로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탓에 늘 승자를 찬양하는데,

그 이면에는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를 내지 못하고 중단한 모든 사람을 실패자로 정의한다.

이런 정신강령이 있는 곳에서 사는 우리가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과는 물질로 나타나지만, 과정에서 동원되는 것은 정신적, 지적 능력과 관계를 조정하는 심리적 기술들이다. 개인의 뛰어난 능력은 자본을 집중시킬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자산이다. 자본주의가 이전 세기와 달리 자연의 위대성을 그 심오함과 광활함에서 찾지 않게 된 것은 인간의 정신 세계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이제 인간의 정신은 무엇보다 경제적 잠재력을 얼마나 품고 있는 가용성의 자산인지가 위대함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상담실에 제 발로 찾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일부 수용한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나혼자 힘으로는 해결이 안될 것 같아. 전문가의 도움을 청해야겠어."

반면에 점집에 가는 사람들은 조금 다르다.

"요즘 도무지 되는 일이 없어. 언제쯤 일이 제대로 풀리는지 알아봐야 겠어."

후자가 왠지 더 능동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정말 건강한 방식이 무엇인지는 말미에 다루기로 하자.


내 직업이 심리상담사인걸 뻔히 아는 친구는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기면 나에게 전화를 한다. 웬만한 일은 친구 사이 수다라 생각하고 들어주지만 간단치 않은 문제가 반복될 때 친구로서 진지하게 상담을 권한 적이 있다. 그러자 친구는 말했다.

“ 상담? 나 받잖아. 나 꾸준히 상담 받고 있어.”

무슨 소리? 거의 30년지기인데 그녀가 상담 받는다는 얘긴 처음 들었다.

“ 그래? 언제부터?”

“너도 알잖아. 그 법사님. 나 중요한 고민 있을 땐 법사님한테 가잖니. 그게 나한텐 심리상담이야~”


맙소사. 도대체 점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지성인인 그녀가 점집을 들먹이며 상담실 가는 것을 거부하는걸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작과 끝만 정해진 게 인생이다. 그 사이의 무수한 사건은 설명과 줄거리가 딱히 없다. 이렇게 의미로 연결되지 않은 무작위의 일들을 인간은 가장 두려워한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인간은 자신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려고 했다. 전설이나 신화, 설화는 모두 그러한 지식이다. 이 모든 이야기 속에는 우주 만물에는 엄정한 순서와 이치가 내재되어 있어 때가 되면 별자리가 그 자리로 돌아오듯이 모든 일은 정해진 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깔고 있다.

그 믿음에 의하면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애쓰고 바라는 데도 세상일이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면 내가 질서의 흐름을 잘못 읽었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니 잘못 읽은 거라면 다른 길을 선택해야하고, 때가 되지 않아서라면 좀더 견디어야 한다.

점집을 찾아가는 이는 말하자면 자신의 힘으로는 고를 수 없는 이 선택지 중에 하나를 누군가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빠른 해결책. 불안이 올라오면 우리는 무엇보다 ‘빠른’ 방법으로 우리 불안을 잠재우려한다.


  만일 내가 해도 안될 일이었다면 그 동안 나의 실패는 내 탓이 아니며 운수 탓이 될 것 이다. 또 지금은 운이 안 좋지만 좀 있으면 일이 풀린다는 얘길 한다면 이제까지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게 된다. 운명론자에게 희망은 계시되어야 한다. 

  실패의 원인이 그저 외부에 있다는 말은 허약한 자아나 우울한 자아에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논의되지 않은 진정한 진리가 있다. 우주는 나의 운명에 아무 관심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을수 있는 것이 삶이며, 따라서 그 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성숙의 첫 단계이다.  오래된 환타지를 폐기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내 삶에 빛과 그림자를 모두 포함해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 만일 정해진 운명을 엿보는 행위에서도 실패한 선택과 노력을 다른 의미로 살려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실패와 상실을 내면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부분 운명론자가 되어 침울하게 다른 길을 (어쩔 수 없이) 걷거나, 꺼진 희망에 풀무질을 하면서 귀인이나 행운의 방향으로 달려갈 것이다. 


  상담실로 걸어들어갔다면  점집과 어떤 다른 일이 벌어질까. 고통을 덜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는 그는 무의식적으로는 거대한 성숙의 욕구로 갈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보기를 때론 거부하고 저항하겠지만, 상담자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길 원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흠이 있고, 미숙하고 때론 겁을 먹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를. 실패를 겪고도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고 다그치고 매섭게 대하는 자신 안의 심판관을.  다른 이를 경멸하거나 공격해버리고 마음대로 지평선을 넘어 다니고 싶은 들짐승같은 자신을.  아무에게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실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분노와 욕망을 우리는 천천히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 물어본다면? 

아, 그것은 경험과 인식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다. 경험 이후 우리는 해방된다.  그래서 거대한 세계 앞에서도 작은 거인처럼 두 발로 당당히 서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구성하는 외부 세계는 정확하게 내면의 그림과 같다.  내 안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면 세계는 확장되고, 섬세해지고, 더욱 선명해진다. 


 점집에 들어가는 우리는 아픔을 슬쩍 내비치지만, 그건 그냥 외부의 자극에 대한 맹렬한 고발일 뿐이다. 자극만 없었더라면 내가 가진 순정한 에너지가 나의 삶을 기쁨으로 가득차게 했을 텐데..라고. 

도리어 내가 외부 세계에 끊임없이 주고 있던 자극, 그리고 외부 자극과 나의 반응 사이에 펼쳐진 광대한 공간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 없이는 우리 삶은 억눌린 무의식이 몰아치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한 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운명은 없다. 피조물의 한계를 운명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도 나의 스토리로 만들면 된다. 그것이 주인으로 사는 길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주인이 되기 보다 전능한 이의 젖과 꿀을 받아 살고 싶어한다. 지금 심리적인 고통때문에 어디라도 가야 겠다면, 운명이나 신이 아닌 나를 만나는 기회를 선물하기를. 내가 풀어본 선물 중에 가장 풍성한 선물이었다고 서슴없이 당신에게도 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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