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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Jul 11. 2016

간직하기와 버리기

나는 버리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어제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오늘은 버려야 한다.

왜냐면 그것의 유효 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펜대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간직해두었던

싸인펜 뚜껑은 이제 버려야 한다.

그 싸인펜을 드디어 찾았지만,

심이 다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글씨를 쓰기 위해서

뚜껑을 버리지 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제짝을 다시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뚜껑은 더이상 그 심을 마르지 않게

닫아줄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유효했던 어떤 것들.

바램, 기대, 소원, 희망이

어느 날 그냥 버려야 할 것이 되기도 한다.

아니 기어이 기다린 것은

이유가 있다.


아프기 때문에

버리지 않고,

아니 버림으로써 버려진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움켜쥐었나 보다.


내가 서랍을 열고,

오래된 싸인펜 뚜껑을 버리기 시작한 것은

그 두려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마 나에게도

버릴 것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였나 보다.


내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 잡동사니뿐이라서

그걸 다 내다 버리면

아무 것도 없이

텅텅 비어버린

불쌍한 내 껍질만 남을까봐

나는

차마 서랍 속을 정리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서랍 속에서

빛나는 것을 찾아

아니

오래된 낡은 잡동사니를 꺼내

잠자고 있던 그 서사들을

다시 읽어주는


그런 나를 간직해주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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