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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Feb 11. 2017

Scene #2

그 뒤론 언제나 버스를 두세 대 보내게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녀는 매일 아침 일종의 레이스 기록관이었다. 우선 집에서 삼거리의 횡단보도 전까지가 1차 구간이었다.시계 한번 보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 멈춤. 파란 신호등을 기다리며 시계를 초조하게 주시했다. 집을 나설 때 0분0초였는데 아무리 빨리 걸어도 횡단보도까지 8분 전엔 안되는군. 가끔씩 삼거리의 커브를 돌았는데 저 앞의 신호등이 초록색인 걸 보면 두 다리는 거의 공중을 날았다. 물론 빨리 횡단보도 앞에 다다랐다고 바로 건널 수는 없었다. 중간에 신호가 끊길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어디쯤 건너는지 보고 횡단보도앞에 얌전히 멈추어 섰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면서 오늘은 교문을 몇분몇초대에 끊을 것인가를 정했다.


그녀가 여전히 그 게임을 하는 건 아니었다. 철길 옆 정류장에 내리면 그녀는 무채색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지워졌다. 소리도 자욱도 없이 전신이 반쯤 흐려지고 맛도 향기도 없는 붓자욱처럼 되버렸다. 가끔 무엇인가에 흔들리면 눈 주위가 한정없 이 투명해져서 온몸이 물기로 꽉 차다가 증기기관차처럼 꽤액 소리를 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도 처음 2주 동안에만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물기가 다 빠져서 마른 종이처럼 바삭바삭 소리가 났다. 피곤해서 쉬는 시간에 잠깐 엎드렸다 일어나면 온몸이 바스락거렸다. 몸을 재게 움직이면 어느 부분이 바스라지거나 푹 주저앉을지 모른다. 반쯤 뜬 건 눈만이 아니었다. 소리도 반쯤 들렸다. 아침이면 삼심오오 모여 얘기를 했지만 그녀의 달팽이관은 소리를 반쯤 걸러 심장 근처 갈비뼈나 관상동맥까지 보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안녕"이라고 말했다.

보고도 인사한 적은 없으니 인사를 해야겠지만 그건 어쩐지 어색했다. 그녀는 아마도 햇살이 밝다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그림 안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날의 동선을 지도 위에 그려야 할까.

낡은 지도를 찾아 연필로 표시를 한다해도 그날의 여정은 아닐 것이다. 오래 오래 지하철 역 안을 돌다가 들어간 스낵바나 그곳에서 어떻게 갔는지 모르는 돌담길. 긴 터널을 걸어나온 광부처럼 지하세계 용을 무찌르고 돌아온 영웅처럼 그날의 빛은 두 눈을 찌르는 듯했다.


그랬다. 그래서 그 날부터는 버스를 한두 대씩 보내기 시작했다. 멀리서 버스가 오는 게 보이면 발바닥에서 쿵쿵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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