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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만혜서 Jan 18. 2023

사랑 매수

오래오래 투자한다.

보름달이 환하게 비춘 밤에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00년 만에 가장 둥근 보름달이라고 하는데 우리 소원 빌자.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월광이 들어오지 않게 눈을 꼭 감고 속으로 속삭였다. ' 부자 되게 해 주세요 ' 나의 소원은 아니다. 그의 소원. 남편은 부자가 되고 싶어 했고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어 했다. 그의 소원이 사랑이 아니라 돈인 건 조금 섭섭하지만 별 수 없다. 나는 이미 바라는 것을 다 이루었기에 소원의 기회를 한번 더 보태었다. 두배로 간절하면 신이 들어주실지도 모르니까.


나는 부자를 바라지도 가난을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어느 태풍 오는 날 회사 선배들과 점심을 먹는데 보리차가 나왔다. 나는 "저에게 보리차는 가난의 흔적 같은 거예요" 라며 담담히 말하였다. 글쓰기를 시작하 고부턴 내 과거를 말하는 게 한결 편해졌다. 가난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놓아도 마음이 쓰리지 않았다. 앞에 앉은 대리님은 가난이라니 너무 슬프다고 하였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생수보다 보리차가 싸서 자취방에서 양은 주전자로 물을 끓여 먹었다고 덧붙였다. 나는 찬물이 먹고 싶은데 뜨거운 보리차만 있어 수돗물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신이 났다. 가난이라는 소재는 다리미가 없어 달군 프라이팬으로 교복을 다린 일같이 남다른 글감이니까.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YOLO족이었다. 스쳐가는 누군가가 얼마나 모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신용카드 결제금액 200만 원을 훌쩍 넘기고 고정 지출이 100만 원 정도 되니 월급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현금이라곤 통장에 찍혔다 사라지는 숫자로 존재해서 가진 돈을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가진 것은 학자금 대출이 다였다. 한 학기 치 빚에 겁먹은 누군가는 그렇게 떠나갔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자 친구였던 남편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도 '한 번뿐인 인생'이었으니 나와 비슷하리라고 짐작했다. 나는 과거의 가난을 벗어나 숨통이 트이자 현재만 소비하며 살았다. 분수에 맞는 미니 투룸에 살며 주제에 맞는 보세 옷을 입었다. 부족한 건 없었지만 모은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30살의 나를 초라하게 했다. 서른 살의 통장잔고는 어른들의 성적표같이 느껴졌다. 9등급의 성적에 충격을 받은 나는 성과급이 들어오는 날짜에 맞춰 모든 신용카드를 잘라 없앴다. 체크카드를 쓰고 적금을 가입하니 신기하게도 돈이 모였다.


결혼식 날짜가 가까워 지자 남편의 상태 메시지도 삭제되었다. 그는 코로나 패닉 이후로 주식에 재미를 붙이더니 투자에 관심을 가졌다. 자기 계발서로 가득 찼던 그의 책장은 온통 투자서적으로 바뀌었다.. 안정적인 은행 예적금에 현금을 묶어 놓았던 나와는 정반대의 투자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위험분산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은행에만 관심을 쏟았다. 사실 목돈만 넣어두면 신경 쓸 일이 없어 좋은 것이었다. 차곡차곡 모이는 뭉칫돈 정도면 만족이었다. 그렇지만 남편은 물가상승률을 대체할 투자방법은 주식이라고 나를 설득하려 하였다. 지역화폐를 쓰라고! 백화점 상품권을 10% 싸게 구입하라고! 신용카드를 신청해서 현금지원을 받으라고! 온라인 폐지 줍기를 하자고!! 은근하게 요구하였지만 나는 투자도 온라인 폐지 줍기도 모두 외면했다. 사실은 귀찮은 거였다. 빚을 내 투자하는 게 무서운 거였다.


결혼 이후 남편과 나의 경제관념이 충돌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남편은 나의 경제 무관심을 서운해했다. 나는 사랑만 있다면 모든 게 다 괜찮았다. 나의 최우선은 돈보다 사랑이니 투자생각은 마음 가장 구석자리로 밀어뒀다. 불꽃 튀는 부부싸움으로 그의 섭섭한 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랑만으로 충분하지만 남편을 덜 섭섭하게 하고 싶었다. 조금의 노력을 해보았다.  젊을 때 왜 대출을 받아도 괜찮은지 찾아보았다. 청약정보를 알기 위해 부동산 알림 설정도 해두었다. 삼성전자를 사두라는 말도 새겨 들었다. <개미가 타고 있어요> 드라마도 빠짐없이 보았다. 주식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라는 투자 장인의 말도 기억했다. 블로그 애드포스트도 신청했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같은 길을 함께 걷겠다고 다짐했다.


어설프게 사랑했다면 영영 이별을 고했을 테다. 부부싸움은 날 찔렀고 가난보다 마음이 쓰렸다. 이 정도로 아플지 알았다면 결혼을 하지 말걸 후회도 했다. 답이 없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런 마음도 잠시 남편의 불행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났다. 아. 이게 사랑이구나. 스물의 나는 마흔까지 살고 싶었었는데, 서른셋의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다. 오래오래의 미래에는 남편이 있다. 살고 싶은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부자를 빌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삶에 투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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